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影島놈들!!

레이찰스 2022. 7. 5. 19:24

 

影島놈들!!

 

나는 철수다. 철수는 영도 놈이다!! 

Pc에 '영도놈들'을 검색해 보세요.  옛말에 영도놈들 하고는 "쌀 한톨도 거래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왜 그랬을까? 영도놈들로 부터 불이익이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후세까지 전하지 않았겠나?    교통이 발달되기전 제주사람들은 본토사람을 말할때 '육지것들'이라고 하였다. 그 말속에는 매일 쌀밥먹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도 섞여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역사속의 영도 

뭍에는 사나운 짐승들이 서식하고 있어 항상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으나

이곳 영도는 섬이기 때문에 이들 맹수들이 없이 안전하였고, 또한 먹이(조개, 생선, 열매)를 구하기가 좋았고 기후가 따뜻하여 살기에 알맞은 곳이었으며, 신라시대부터 선조 중기까지는 목장으로 말을 방목한 곳으로 유명하다.

 

영도는 신석기시대의 동삼동패총, 영선동패총 등으로 보아 부산지방에서

가장 먼저 사람이 살기 시작했던 곳이라 추정된다.
패총이란 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 껍질이 쌓여 생긴 것인데 그 속에는 여러 가지 사람들이 쓰던 유물이 썩지 않고 잘 남아 있어 그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영도는 선사시대에 여러 가지 생활여건이 당시로는 사람살기에 가장 알맞은 곳이었다

 

 

 

내가 영도와 인연을 맺은 것은 부산과 통영에서 초등학교를 12군데 다니고

6학년 1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때  부산으로 전학온 곳이 영도 남항초등학교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1,2학기를 끝내고 분단으로 나뉘어 입시준비만 하고 있었다...(중략)...  영도는 그당시 나에게 퍽이나 좋은 곳이었다.  시골에서

영도로 왔기에 부산중학과 부산고도 다닐수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 바닷가에 나가면 멍게,게,소라,조개 담치등 먹거리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헤엄치고 놀러간 것이 아니라 먹거리를 구하려고 물질하기 위해서 였다. 그렇지 않아도  어릴 때부터 척박한 환경에서 자생하는 들꽃처럼

자라온 나였기에 영도는 아주 멋진 곳으로 각인되었고  강렬한 자생력을

키워갔다. 

 

 

우리의 학창시절 주된 교통수단은 전차통학이었다. 남항동 사거리에 전차

종점이 있었고 영도놈들이 부산시내 어느학교라도 가려면 모두 전차종점에 모여야했고 ...자연적으로 영도놈들 끼리는 모두다 친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어느날 K상고에 다니는 P군이 며칠 보이지 않아 물어보니 범일학원에서 누구에게 맞아서 병원에 누워있단다.   그얘기를 듣고 영도놈몇놈이 범일학원에

가서 그놈을 손좀 봐주고 돌아왔다.

어느날 고상길과 전차를 타고 오다가 상길이가 타고교 학생들과 시비가 붙어 

상길이가 한녀석의 멱살을 잡고 전차에서 내리자 상대학교 학생 대 여섯명이 

상길과 내리게 되었고 이때 내가 같이 내려 2:6의 싸움질이 시작 되었고 그때 파출소에 신고가 들어가 경찰이 현장에 출동하여 파출소에 연행 되었다.

경찰조서가 끝나고 경찰이 "야! 너희 둘 일어서 " 하며 돌려 보내려 하자

상대방 학생들이 "우리가 얻어 맞았는데 왜 때린 사람들을 보내주냐? 하며

항의 하였다.그러자 경찰이 "부고생 두명이 너희들 여섯명을 때렸다는게

말이 돼는거냐? 하며 찍소리도 못하게 해놓고 우리둘은 귀가 하였다.  

 

 

영도놈들!!      어디를 가도  놈들은 학교는 다를지언정 단결된 힘을 보여

주었다.  나하고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영도놈들 이라는 묶음에서 생긴 인연이 그렇게 되었나 보다. 이런 일이 수차례 일어나다보니 영도서(당시는 수상서라고 불렸다) 에서 출석요구서가 날아오고...불려가 조서를 꾸미기도 수차례였다.  영도서 형사들도 나를 보면 "나철수 또 왔나?" 했다. 

 

여러명이 집단으로 싸움이 있었는데... 불려간 사람은 나혼자 였다.상대방

학교 학생들이  부산고 다니는 나철수 이름을 기억하고 신고 하였단다.   

마침 K상고에 다니던 Y군의 형님이 그당시 모대학에 다녔는데... 가칭 주먹

쟁이 였다. 보호실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그형님이 조사실에 찾아왔다. 

담당형사가 보호실 문을 열어주고 내가 나오자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며  나를 경찰서 밖으로 내몰았고 그길로 나는 귀가할 수 있었다. 

 

이런일이 수차례 있으니 학교에서도 알게되고 집단폭행의 주동자로 정학을 당하기도 하고...  어느날은 영도놈들 눈에 왕자극장앞에서 여학생에게 추근대는 놈이 걸렸는데 이놈이 부고 뱃지를 달고 있었다.    물어보니 2학년 몇반이란다.    담임선생을 물으니 답변을 하지 못한다. 순간적으로 이놈이 가짜임을 알게되고...길거리 사람 많은곳에서 손볼 수도 없고...이놈을 끌고 대교로 송대헌군의 집 모퉁이 으슥한 원목 저장고로 납치해서 S,Y,N군 그리고 내가 차례로 돌아가며 손 봐주었다. 

이렇게 영도  놈들은 惡童이었다.

 

 

 

학교 등교시 지각을 하면 교문앞에서 주번 선생님으로부터 호된 기압을 받고 교실로 들어가면 같은반 반우들이 "선생님! 나철수 영도 사는데 오늘 지각

했습니다"하고 일러주니 노기석 선생님이 "나철수 나와!"    그리고는 언제나 같이 노기석 선생님이 손바닥을 회초리로 때리고, 귀옆 머리를 위쪽으로 치켜든다. "아야~아야!" 그러길 5~6차례하여 일단 나철수 기를 꺾어놓고 수업이 시작된다. 같은반 반우들도 영도놈 나철수가 기압 받는걸 보고 즐기고 좋아

하는 눈치다.

 

 

조내기 고구마
조내기 고구마는 옛날 영도의 특산물이라 할 수 있다.    청학동, 동삼동

일원의 황토밭에서 재배하였으며, 붉은 색깔을 띠며 아주 작은 이 고구마의 맛은 잘 익은 밤맛에 비견 될 정도다. 일제때도 목도의 고구마로 명성을 떨쳐 일본인들은 이 고구마를 구하기 위해 영도에 줄을 이었다고 한다.      특히 조내기 고구마중 일산배기 고구마 맛이 일품이었는데, 현 청학2동에서

태종대로 가는 간선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천리교포교소가 나온다. 여기서

조금 올라가면 조그만 산등성이가 나오는데 이 곳이 일산배기이다. 옛날

조내기 고구마를 생산했던 이 일대는 지금 거의 주택지로 변모하여 자취를

찾기 힘들다.

 

 

김재용이는 청학동에 거주하며 학교를 다녔다. 어느날 재용이가 부산상고

교복에 모자를 쓰고 전차를 탔다. 이것을 본 내가 재용이의 모자를 손으로

치며   "야! 니 지금 뭐 하는기고? "하니 여늬때 같으면 무엇이라도 대꾸

할텐데... 아무말도 하지 않고 우리일행과 떨어진 전차 뒷쪽으로 갔는데 초량에서 우리 일행이 다 내려도 재용이는 내리지 않고 그냥 타고갔다. ......

며칠뒤에 알게된 사실은 그날사건은 재용이가 아니고 재용이의 쌍동이 형

이었던 것이다.

 

 

惡童들의 LOVE-STORY

전차를 이용해 통학을하니 여고생들과 대면할 기회도 많았다. 우선 잘생긴

상서에게 K여고 다니는 L양이 Love letter를 보냈는데 내용이 '매마른 가지에 불을 붙여 놓고..로 시작 하였고 이후 우리는 L양을 DRY라고하는 애칭

으로 불러 주었다. 수남이는 영도놈이 아니었지만 영도놈들과 자주 어울려

다녔다. 그는 춤을 잘추어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L양과  나중에 여류

작가가 된 P양이 그를 좋아 하였다. 덕현이는 P여고에 다니는 K양이 좋아

하였고 어느날 덕현이가 나와 같이 K양집에가서 그는 K양과 아랫층에서 나는 다락방에서 K양의 여동생과 하룻밤을 지낸일이 있었다.     나를 좋아하던

N여고 다니던 글래머 J양은 이룰수없는 사랑에 수면제 먹고 자살소동까지

벌이고...

 

 

경규는 장발단속으로 머리를 깍이자 그후 계속해서 백구치고 학교 다녔고

융조는 옷을 당정히 입었다. 바지에 손이 베일듯한 주름을 잡고 깔끔한것

으로는 일등 이었다. 외동 아들인 병모도 초량에 살면서 영도놈들과 언제나 같이 다녔다.   학교 다닐때의 에피소드를 몇자 적어 달라는 이형윤 사무총장

명령으로 Key Board를 앞에 놓고 오래된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그사이

우리는 여러명의 동기들을 잃어 버렸다. 경규,병모,융조  이 세명은 영도놈

들과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어깨동무하고 다니던 사이였다.        눈시울이 뜨거워 옴을 느낀다. 먼저 떠나간 동무들의 명복을 빌고 영혼에 안식이

오기를 빈다.  

 

 

 

 

영도놈들!!  이제 칠순이 넘어가니 그놈들이 보고싶다.

내가 통영에서 이곳으로 오지 않았다면 나의 현재는 180도로 다른 삶을

살았을 텐데... 하늘이 내려준 영도와의 인연 맺음을 감사하며 함께한 惡童

들이 보고 싶구나.  오랫만에 필을들어 옛일을 추억하며 어느 하늘 아래서

어려운 세파에 찌들려 어렵게 살아가고 있겠지~~ 그래도 너나 나나 우리는 6.25와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척박한 환경 속에서 꿋꿋히 자라온 세대가 

아니었더냐?   이제는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

얼굴 한번 봤으면 좋겠구나 ~~.

 

                        2015.3.18.  봄비 내리는 아침 부산에서 海園  羅  哲  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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