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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포항에… 이름없는 천사들이 내려왔다

레이찰스 2022. 9. 9. 07:57

눈물의 포항에… 이름없는 천사들이 내려왔다

“태풍 아픔 함께 극복해요” 추석 앞두고 전국서 발길

11호 태풍 ‘힌남노’로 주민 9명이 숨지는 등 큰 피해를 본 경북 포항시에 전국의 자원봉사자들이 모이고 있다. 추석 연휴 전날인 8일 자원봉사자 등 9000여 명이 포항 곳곳에서 복구 작업을 도왔다. 사진은 8일 오후 포항 오천읍에서 자원봉사자들이 쓰레기를 치우는 모습. 이들은 “수해 입은 포항시민들을 돕고 싶은 마음에 곧장 달려왔다”고 했다./ 김동환 기자
8일 오후 1시에 찾은 포항시 오천읍 용산리의 한 1층짜리 단독주택. 80대 노부부가 신혼 때부터 60여 년간 살았다는 이 보금자리는 지난 5~6일 태풍 ‘힌남노’가 할퀴고 간 흔적으로 가득했다. 당시 폭우로 집이 성인 허리까지 침수된 탓에 이날 마당엔 현관문 절반 높이까지 흙더미가 수북했다. 집주인 우구두(86)씨는 물이 갑자기 차올라 휴대전화와 2만원이 든 지갑 하나만 든 채 소방대원들에게 구조됐다고 한다. 그는 아침부터 아내와 함께 호미로 한참 진흙을 파내고 있었다.

진흙탕 속에서 추석 연휴를 맞을 뻔한 부부에게 서울 서대문구에서 온 봉사자 35명이 찾아왔다. 공무원 15명과 일반 시민 20명으로 팀을 꾸린 이들은 오후 내내 삽으로 진흙을 파내고 가재도구들을 밖으로 빼내며 집을 치웠다. 현장에서 만난 이진원·유성복(72)씨 부부는 “즐거웠어야 할 명절이라 더 마음이 힘들 포항 사람들을 생각하며 작은 일이라도 하고 싶어 내려왔다”고 말했다.

초강력 태풍 중 하나였던 힌남노로 인한 포항 전체의 피해액은 8일 기준 1조73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 8월 수도권 등 중부지역의 집중 호우로 생긴 피해의 6배다. 특히 지역 대표 기업인 포스코와 현대제철에서만 1조5000억원의 피해가 났다. 포스코는 공장 고로가 49년 만에 멈춰 섰다. 앞으로 피해 규모가 더 커질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포항이 위기를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전국 곳곳에서 ‘시민 의인’들이 나타났다. 대구나 울산 등 인근 지역은 물론, 멀리 떨어진 서울이나 광주광역시, 충북 단양 등에서도 자원봉사자들이 몰려들었다. 8일 봉사에 나선 민간인만 3500명에 달한다. 군·공무원 약 5500명까지 총 9000명이 피해 복구에 나섰다. 이날만 포항 21개 읍·면·동 곳곳에 자원봉사자들의 손길이 닿았다. 특히 추석 연휴를 앞두고 고향에 가거나 집에서 쉬기보다 위기에 처한 이웃에게 손을 내미는 일을 택해 감동을 더했다.

11호 태풍 힌남노 휩쓸고 간 경북 포항시 남구 오천읍 일대에서 자원봉사자들이 복구작업을 하고 있다./2022.09.08 김동환 기자
8일 포항시 오천읍 구정리에서는 광주광역시에서 온 봉사자 80여 명이 땀을 훔쳐가며 태풍으로 쓰러진 주택의 피해를 복구하는 작업을 했다. 300만원어치 간식과 안전모·장화 등 구호 물품도 전했다. 임이엽 광주시자원봉사센터장은 “실제 포항에 와보니 피해가 생각보다 훨씬 커서 놀라고 마음 아팠다”면서 “집집마다 냉장고, 가구 등이 물에 잠겨 추석 연휴를 밖에서 보낼 수밖에 없는 시민들이 너무 많을 것 같아 걱정”이라고 했다.

경북 23개 시군 곳곳에서도 도움의 손길이 이어졌다. 김재원(65) 경북도 바르게살기협의회장은 “7일 밤부터 경북 23개 시군 회원들에게 포항이 피해가 크니 얼른 가서 돕자고 연락했다”며 “그러니 새벽부터 한달음에 200여 명의 회원들이 자기 일처럼 달려와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포항과 ‘해오름동맹’ 사이인 울산시도 8일 자원봉사단 100여 명을 파견하고, 성금 1억원을 전달할 예정이다.

힌남노 피해를 똑같이 입은 포항 시민들이 자기보다 더 고초를 겪는 사람들을 위해 나선 사례도 잇따랐다. 포항시 두호동의 활어 도매상 손락원(59)씨는 이날 오전 생업도 제쳐 놓고 오천읍 용덕마을로 달려갔다. 횟감으로 쓸 물고기를 싣는 5t짜리 물탱크를 물로 가득 채운 다음이었다. 용덕마을에 도착한 그는 이 물로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마을을 뒤덮은 흙더미를 씻어내기 시작했다.

8일 오후 태풍 ‘힌남노’가 휩쓸고 간 경북 포항시 오천읍에서 활어 도매상 손락원(59)씨가 활어차(트럭)에 물을 가득 싣고 와 청소 작업을 돕고 있다. 그는 “깨끗하게 씻어 놓으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고 말했다. 이날 포항에는 손씨 같은 ‘의인(義人)’들이 피해 현장 곳곳에서 구슬땀을 흘렸다./김동환 기자

11호 태풍 힌남노 휩쓸고 간 경북 포항시 남구 오천읍 일대에서 복구지원을 나온 해병대 병사들이 복구작업을 하고 있다./2022.09.08 김동환 기자
또 이 마을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김종필(49)·박원희(43)씨 부부는 하루 종일 동네를 돌며 어르신들의 집 안에서 가재도구를 꺼내느라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물에 잠겨 더러워지고 망가진 살림살이를 옮길 수 없어 쩔쩔매던 어르신들 대신 나선 것이다. 겨울에 쓰려고 쌓아 놓은 연탄이 물에 녹아내려 흙더미처럼 된 집도 있었다. 김씨는 “이 동네는 지난 6일 새벽 집집마다 물이 많게는 어른 허리까지 찼다”면서 “다들 동네 선후배인데 내 집 네 집 가릴 수 없어 나선 것”이라고 했다. 김씨네 카페도 침수됐지만 가장 마지막에 치울 생각이라고 했다. 주민 한연순(73)씨는 “안방이며 창고, 마당까지 물이 차 온 집 안 가구를 들어내야 했는데, 봉사자 분들이 아니었으면 엄두도 못 냈을 일”이라고 했다.

태풍으로 버스 차고지 앞 도로가 유실돼 버스 60대가 고립되자, 자기 고추밭을 절반 이상 베어낸 농민도 있었다. 오천읍 문덕 차고지 인근에서 고추 농사를 짓는 여성 A씨다. 그는 자기가 키우던 고추 줄기 300포기 중 150포기를 베어내고 생겨난 공간으로 버스가 다닐 수 있게 길을 터줬다고 한다. A씨는 “시민의 발이 멈춰선 안 되니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하며 이름도 알려주지 않았다.

8일 오후 경북 포항시 오천읍 냉천 옆 문덕버스차고지 앞 무너진 도로 옆에 고추밭을 덮고 만든 길위로 차량들이 지나가고 있다.익명의 농민인 여성 A씨가 50여평 규모 고추밭을 포기하고 만든 도로이다./2022.09.08 김동환 기자
포항시 동해면에 사는 주부 김은숙(61)씨는 자기도 수해를 입었지만 더 큰 피해를 입은 주민들과 소방대원들을 며칠째 돕고 있다. 지난 6~7일에는 지하 주차장이 물에 잠겨 7명이 숨진 아파트에서 컵라면과 커피를 나눠줬다. 김씨는 “나는 그냥 집에 물이 들어와 전자레인지 같은 가전제품이 고장 난 정도”라며 “소방대원들이 힘내서 실종자들을 빨리 구조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고 했다.

온라인에서도 이재민들을 돕겠다는 얼굴 없는 의인들이 잇따랐다. 포항의 한 인터넷 맘카페엔 지난 7~8일 이틀간 이웃을 돕겠다는 취지의 글이 200건 가까이 올라왔다. 포항시에 사는 박주영씨는 한 인터넷 맘카페에 “집 한 칸을 수해를 입은 분들께 빨래방으로 내드리고 싶어요”라는 글을 올렸다. “부담 없이 오셔서 세탁·건조를 하실 수 있게 돕겠다. 왕복이 번거로운 주민들은 직접 차로 모셔다 드리겠다”는 내용이었다. “단전·단수가 된 지역에 생수와 간식을 배달하겠다”면서 물품 배달 차량을 지원하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포항 시내에서 식당을 운영한다는 한 자영업자는 가게 이름을 밝히며 “이재민과 봉사자들을 위한 식사 100인분을 제공하겠다”고 소셜미디어에 글을 올렸다. 포항 남구 오천읍의 헬스장인 ‘저스트짐’을 운영하는 박민희씨는 지난 7일 소셜미디어에 “(태풍 피해 주민들에게) 화장실과 샤워실을 무료로 개방한다”면서 “피해가 완전히 복구될 때까지 오셔도 좋다”는 뜻을 밝혔다. 글을 올린 후 하루 만에 50여 명이 실제 다녀갔다고 한다. 오천읍의 미용실 ‘살롱드 빈’도 지난 7일 “무료로 머리를 감고 전기 충전이나 세탁도 하고 가시라”는 글을 올렸다. 이후 20여 명이 미용실을 찾아 머리를 감거나 세탁을 했다고 한다.

이승규 기자 godam@chosun.com김주영 기자 vow@chosun.com권광순 기자 fact@chosun.com신지인 기자 amigo@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