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가 왜 초록색이야? 고래도 새끼낳고 먹은 이것의 비밀 [e슐랭토크]
중앙일보
동해서 마시는 ‘초록색 맥주’…미역으로 만든 이유는
지난달 30일 오후 경북 포항시 북구 경상북도청 환동해지역본부 대회의실. 플라스틱통과 캔에 담긴 맥주가 대회의실 탁자 위에 나란히 진열돼 있었다. 평소 이곳에서 회의가 자주 열렸지만, 맥주가 등장한 것은 처음이었다. 투명한 플라스틱 통에 담겨 있는 맥주 색깔이 초록빛이기까지 해 생경한 풍경이었다.
경북도 환동해지역본부와 영덕로하스수산식품지원센터, 대경맥주가 개발한 해녀 미역 맥주. 김정석 기자
경북 해녀가 채취한 미역을 활용해 만든 해녀 미역 맥주 모습. 김정석 기자
플라스틱통 겉에 붙은 라벨에는 ‘경북해녀 미역 맥주’라고 적혀 있었다. 이날 국내 최초 해녀미역맥주 개발 및 산업화를 위한 상호협력 협약서(MOU) 체결식이 진행됐다. 초록빛이 도는 미역맥주도 시제품이 개발돼 이 자리에서 공개됐다.
맥주가 초록빛을 띠고 있는 것은 경북 동해안 해녀들이 직접 딴 자연산 미역 추출물이 들어 있어서다. 색깔뿐 아니라 맥주의 맛 또한 미역의 향이 은은히 풍긴다. 한 모금 마시면 처음에는 일반 라거 맥주와 비슷한 맛을 느낀다. 이어 곧바로 미역 특유의 감칠맛 나는 ‘바다향’이 따라온다. 대구·경북 지역을 무대로 지역 맥주 개발에 힘을 쏟고 있는 대경맥주가 제품 생산을 맡았다.
MOU 체결식에 참석한 김남일 경북도 환동해지역본부장은 “소주 애호가들이 제주도에 가면 반드시 제주 지역 소주를 찾듯이 경북 동해안에서도 ‘해녀미역맥주’를 찾게 하는 것이 목표”라며 ”아직 정확한 출시 시점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출시를 앞당기기 위한 개발에 힘을 쏟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경북도 환동해지역본부와 영덕로하스수산식품지원센터, 대경맥주가 국내 최초 해녀미역맥주 개발 및 산업화를 위한 상호협력 협약서에 서명한 후 기념촬영하고 있다. 왼쪽부터 문준기 대경맥주 대표와 김남일 경북도 환동해지역본부장, 김명욱 영덕로하스수산식품지원센터장. 김정석 기자
미역 채취 세계 첫 기록 삼국유사에…한국은 ‘미역 발상지’
경북을 대표하는 여러 식재료 중 특별히 미역을 맥주 개발에 쓴 이유는 뭘까. 경북해녀 미역 맥주 개발을 주도한 경북도 환동해지역본부와 영덕로하스수산식품지원센터는 한국이, 그중에서도 경북이 ‘세계 미역문화의 발상지’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을 세계 미역문화의 발상지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현존하는 문헌 등에 따르면 세계에서 미역 채취의 역사가 가장 오래된 곳은 한국이다. 또 한국인이 전 세계에서 미역을 가장 많이 먹는다.
미역 채취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 ‘연오랑세오녀’ 편에 등장한다.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가 바다에 나가 해조(海藻)를 따는데, 갑자기 바위 하나가 나타나 태워서 일본으로 갔다”는 내용이다. 이 기록을 근거로 한다면 적어도 서기 157년에 한국에는 미역 등 해조류를 채취하는 문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북 포항시 연오랑세오녀 테마파크에 연오랑세오녀 글자를 표현한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김정석 기자
한국인이 언제부터 미역을 먹었는지 정확한 연대를 특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고구려 시대 때부터 미역을 칭하는 단어가 사용된 점으로 미루어 그 이전부터 미역을 먹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구려에서는 ‘물’을 ‘매(買)’라고 한자로 표현했다. 미역을 ‘여뀌’라는 풀과 비슷하다고 해서 ‘물여뀌’라는 의미로 ‘매여뀌’로 불렀고, 이 단어가 ‘매역’에 이어 ‘미역’으로 변했다.
양식에 성공하기 전까지 미역은 직접 바닷속 바위에 자라는 것을 따는 방식으로밖에 채취가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미역은 왕실과 귀족에게 진상되는 귀한 음식이었다. 고종 1년 갑자년(1864) 1월 3일 기록에 “경모궁에 천신할 미역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걱정했던 것으로 미뤄 미역이 궁중 제사에도 사용된 공물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래가 새끼 낳고 미역 먹는 것 보고 출산 후 먹어”
8세기 당나라에서 발간된 일종의 백과사전인 『초학기』에는 한국인이 미역을 즐겨 먹고, 나아가 일종의 ‘문화’로까지 발전한 내용이 나온다. “고래가 새끼를 낳은 뒤 미역을 뜯어 먹어 산후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을 보고 고려 사람들이 산모에게 미역을 먹인다”는 내용이다. 당시부터 산모가 미역을 먹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오늘날에도 출산 후나 생일을 맞았을 때 미역을 먹는 문화가 이어지고 있다.
쇠고기미역국. 중앙포토
한국은 ‘세계 미역문화의 발상지’일 뿐 아니라 ‘미역 종주국’이기도 하다. 김남일 본부장이 펴낸 『미역인문학』에 따르면, 미역 자체를 먹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한국·일본·중국·대만·미국(하와이) 등이 있지만 전 국민이 미역을 상시로 먹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다. 그중에서도 한국은 미역 소비량이 월등하게 많다. 1인당 연간 5㎏의 해조류를 먹는데, 그중 미역이 75%를 차지한다. 반면 일본인은 김과 다시마를 주로 먹는다.
한국이 미역 종주국에 오르는 데는 미역국이 큰 몫을 했다. 단순하게 미역 천연의 맛을 살린 맑은미역국이나 된장미역국, 대부분 지역에서 먹는 쇠고기미역국, 황태(북어)미역국이 널리 알려져 있다. 가자미 같은 흰살 생선이나 조개류를 넣는 지역도 있고 붉은 생선을 다져 완자 형태로 넣거나 생전복을 넣기도 한다. 돌문어미역국·도루묵미역국·보말미역국·꽃게미역국·주꾸미미역국 등 해당 지역에서만 먹을 수 있는 미역국도 있다.
김남일 경북도 환동해지역본부장이 지은 『미역인문학』에 실린 '팔도 미역국 지도.' 사진 휴먼앤북스
하지만 ‘미역 종주국’을 일본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이는 명란젓을 일본 음식으로 여기는 것과 흡사하다. 세계 최초로 해은 김여익(1606~1660)이 김을 처음 재배했지만, 일본의 ‘노리(のり)’가 세계적으로 김의 보통명사가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본에 빼앗겨 가는 미역 종주국 지위
미역 종주국 지위를 지키기 위해 전통 미역 채취 방식인 ‘울진·울릉 돌미역 떼배 채취어업’을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 사람은 노를 잡고 뗏목처럼 생긴 떼배를 이동시키고, 한 사람은 창경(수경)으로 수심 1~5m의 바닷속을 들여다보면서 낫대로 미역을 잘라 올리는 작업을 하는 어업 방식이다. 떼배 채취어업은 ‘통영·거제 견내량 돌미역 트릿대 채취어업’과 함께 미역 관련 국가중요어업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경북 울진·울릉 지역의 전통 미역 채취 방식인 돌미역 떼배 채취어업 모습. 사진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울릉도독도해양연구기지
경북 울진·울릉 지역의 전통 미역 채취 방식인 돌미역 떼배 채취어업 모습이 담긴 옛 사진. 사진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울릉도독도해양연구기지
김남일 본부장은 “미역종주권에 대한 치밀한 과학화와 국제화가 필요하다”며 “이를 위해 국가중요어업유산으로 등재된 울진·울릉 돌미역 떼배어업의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 등재와 함께 ‘전통 해조류 식문화와 어촌공동체 문화’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올리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포항=김정석 기자 kim.jung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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