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동물원] '하쿠나 마타타'의 끔찍하고 불편한 진실
정지섭 기자사자왕 심바의 '베프'로 나오는 혹멧돼지..야생에선 천적-먹잇감 관계
덩치가 작아 포획쉬운 먹잇감으로 인기
여느 멧돼지와 다르게 탁트인 사바나에서 살아
광활한 사바나가 떠오르는 햇살에 붉게 물듭니다. 기린, 코뿔소, 코끼리, 물소 등 내로라하는 사바나의 거인들이 새로 태어난 새끼사자를 알현하러 사자무리의 서식지를 향해 발걸음합니다. 스와힐리어 찬가가 우렁차게 흘러나옵니다. ‘난츠 이고냐마 바기티 바바, 시티 움 이고냐마~’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이가 더 많을, 이 장면. 바로 28년전 한국 극장가에서도 개봉돼 한국을 포함해 전세계 박스 오피스를 제패했던 ‘라이온킹’의 오프닝입니다. 만화영화와 실사판, 뮤지컬 등으로 모두 메가톤급 히트를 거둔 라이온킹은 아프리카 동물의 왕국을 배경으로 가족애와 모험과 사랑, 배신과 욕망을 투영한 우화로 알려져있죠.
라이온킹의 주인공과 명품조연인 심바와 품바는 사실 현실세계에선 이처럼 포식자와 먹잇감으로 맞닥뜨리는 운명이다. 아프리카 케냐 마사이마라 평원에서 숫사자가 막 혹멧돼지 사냥에 성공한 모습. /alamy그렇습니다. 어디까지나 동물 캐릭터로 인간만사를 그린 비유의 이야기입니다. 환타지이자 허구예요. 세상에 어느 정신나간 짐승이 자기들 잡아먹는 천적의 새끼에게 절을 하고 만수무강을 축원하러 가겠습니까. 그 강력한 덩치와 발굽으로 밟아서 짓이겨놓아 대를 끊어놓는게 오히려 살아가는데 이득인데요. 라이온킹의 허구에는 썩 바람직하지는 않은 설정도 등장합니다. 혹멧돼지 품바와 미어캣 티몬은 단지 사자무리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잔혹한 먹이사슬에서 예외를 인정받습니다. 인맥과 연줄만 잘 타면 동족들이야 어떻게 되든 목숨을 부지한다는 이기적 메시지가 은연중에 숨어있어요.
디즈니테마파크 퍼레이드에서 라이온킹 캐릭터들은 최고 인기를 구가한다. 플로리다주 디즈니월드 매직킹덤의 매지컬 모멘트 퍼레이드에 심바와 품바가 나란히 등장한 모습. /Disney Parks Blog라이온킹에서 파생된 그 유명한 문구 ‘하쿠나 마타타’가 등장하는 노래 장면도 실제 동물들이 안다면 기가 찰 노릇입니다. 혹멧돼지 품바는 그저 걱정 놓고 편하게 살면 된다며 ‘하쿠나 마타타’를 흥겹게 부르지만, 사실 이 족속 혹멧돼지는 가련하게도 동물의 왕국에서 가장 마음놓고 살 수 없는 존재랍니다. 너무 크지도 않지만 작지도 않아서 어쨌든 끼니거리는 될 뿐더러, 포획 난이도가 비교적 쉬운 편이기 때문입니다. 재칼, 리카온, 표범, 하이에나, 치타, 그리고 대장짐승 사자까지 온갖 육식동물들이 만만한 식사거리 혹멧돼지를 잡기 위해 사바나 구멍을 뒤지고 다닙니다. 어디 육상뿐입니까, 하늘에서는 독수리가, 물가에서는 악어가 호시탐탐 눈에 불을 켜고 이들이 사정권에 오기만을 기다리지요. 지금도 사바나 어느 한곳에서는 혹멧돼지가 포식자들에게 붙잡혀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생의 마지막을 맞고 있을 것입니다. 제대로 된 실사판 ‘라이온킹’은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전연령 관람불가에 가깝습니다.
라이온킹 '품바'의 실제 모델 혹멧돼지. 아프리카에 사는 3종의 멧돼지 중에서 가장 많은 지역에 분포한다. 멧돼지중 드물게 너른 초원에 산다. /National Science Foundation초식동물(소)의 무리에 속하되 잡식으로 특화한 멧돼지는 사실 세계에서 가장 번성하고 있는 짐승집단 중의 하나입니다. 원래는 미주와 호주 대륙에는 없었지만, 사냥용이나 식사용 등의 목적으로 데려가 숲에 풀어놓은 멧돼지들이 야생에 완벽히 적응하면서 토착 생태계를 파괴하는 괴수가 됐죠. 동남아 밀림에는 엄니가 둥글에 휘어 자라다가 결국 다시 콧잔등을 뚫고 나가는 가련한 생의 굴레에 갇힌 바비루사가 있고요. 아프리카에는 세 종의 야생멧돼지가 있습니다. 덥수룩하고 검은 털로 뒤덮여 원시의 풍모가 묻어나는 산림멧돼지, 갈색과 흰색, 검은색의 삼색이 어우러진 털빛깔이 아름다운 강멧돼지가 있지만, 극히 제한된 지역에만 살아가는 희귀종입니다. 가장 널리, 또한 많이 살고 있고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종이 바로 라이온킹 품바가 속한 족속인 혹멧돼지랍니다. 수컷의 눈옆으로 튀어나와있는 물사마귀 같은 돌출부 때문에 이 같은 이름이 붙여있는데, 대체 어떤 기능을 하는지는 아직 확실히 파악이 안됐대요. 사람으로 치면 남성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목젖이나 수염의 역할을 하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혹멧돼지는 통상 한 배에 서너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어미는 새끼를 헌신적으로 키우며 천적에 맞서 용맹하게 보호한다. African Widlife Foundation대부분 멧돼지가 밀림이나 산속에 살고 있는 것과 달리 혹멧돼지의 서식 무대는 너른 초원입니다. 땅에 굴을 내고 사는데, 돼지와 닮았지만 돼지는 아닌 땅돼지가 파놓은 굴을 무상임대하기도 해요. 굴속에서 바깥 동향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항상 머리를 바깥쪽으로 향할 정도로 조심성이 많습니다. 멧돼지 특유의 구부리듯 앞으로 솟은 엄니는 육식동물의 공격을 받을 때 대적하는 훌륭한 무기가 됩니다. 돼지라는 말이 무색하게 달릴 때 시속 50㎞까지 속도를 낼 수 있어요. 거친 사바나에서 혹멧돼지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돌진하는 모습은 강렬한 인상을 남기죠. 이런 터프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이 혹멧돼지의 운명은 잔혹하기 그지 없습니다. 누우나 물소처럼 덩치 크고 발길질이 거친 동물들의 사냥법이 성문종합영어나 실력수학의 정석이라면, 혹멧돼지 잡는 건 성문기초영문법이나 기본수학의 정석 첫페이지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일단 체구 자체가 작거든요. 물소의 뿔이나, 기린의 발길질 같은 살상병기도 없습니다. 스피드로 압도해서 잡기도 하지만, 맹수들의 혹멧돼지 사냥은 주거침입입니다. 구덩이를 막아서서 대치를 합니다. 그새 못참고 구덩이속으로 들어가 직접 이빨로 물어서 끄집어내기도 합니다. 다 자란 숫사자 두 마리가 협업을 해서 구덩이에서 혹멧돼지를 끄집어내 사냥에 성공하는 TOP ANIMALS 유튜브 동영상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러대는 혹멧돼지의 처절한 몸부림이 귓가를 아프게 후벼팝니다. 라이온킹의 심바와 품바도 만화 밖 현실에서는 엄연히 이런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이지요. 냉혹한 자연의 생태계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갑니다. 사자·표범·하이에나·치타 등 내로라하는 육상맹수들에게 있어 혹멧돼지는 주린 배를 비교적 쉽게 채울 수 있는 매력적인 선택입니다. 그러니 한 마리의 혹멧돼지의 다른 종류의 맹수들이 함께달려드는 기괴한 장면도 등장합니다. Capture The Wild 유튜브에 올라온 아래 동영상은 야생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표범이 혹멧돼지의 목덜미를 물어 숨통을 끊으려는 현장에 하이에나가 침입을 했습니다.
목덜미를 표범에게 물린 혹멧돼지가 끝까지 최후의 저항을 하며 발버둥치는 상황에서 들이닥친 하이에나는, 잠시 탐색전을 벌이더니 이 족속의 악명을 낱낱이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이 동영상 다음장면에서는 하이에나가 영양 뿔도 으스러뜨린다는 강력한 치악력을 가진 이빨을 앞세워 자신에게 고스란히 노출된 혹멧돼지의 몸뚱아리를 향해 돌진합니다. 이 혹멧돼지는 어쩌면 더 고통스러워지기 전에 진작 숨이 멈추는게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표범이 혹멧돼지의 숨통을 끊으려 목덜미를 문 사이에 하이에나가 다가와 혹멧돼지를 공격하려고 하고 있다. /Capture The Wild Youtube야생의 세계에는 배려심 같은 건 없습니다. 저들도 뇌가 있는 생명체니 측은지심의 감정이 있을 것이라는 오산은 진작에 버려야 합니다. 먹잇감이 어리거나 노쇠하거나 약하면 그만큼 쉽게 사냥당합니다. 어린 생명들을 품고 있는 어미라고 해서 봐주지도 않습니다. 고기를 잡을 때 치어와 산란기 암컷은 잡지 않는 등 분별력을 가진 인간의 지성이 사바나의 야수들에게 털끝만큼이라도 있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만일 그게 가능하다면, 성별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적의 공격에 비참하게 삶을 마감하는 혹멧돼지의 처절한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바나의 맹수들은 사냥감이 어리고 연약하다고 해서 동정심을 베풀지 않는다. 새끼 혹멧돼지 사냥에 성공한 암사자의 모습. /Smithsonian Magazine. Gene Hollander이런 천적들의 습격 속에서도 오늘도 혹멧돼지들은 꿋꿋하게 흙먼지를 날리며 사바나를 질주하고, 짝을 짓고 새끼를 키우며 살아갑니다. 대부분 천적들에게 비극적으로 희생되곤 하지만, 때로는 용감하게 싸워서 치명상을 입히기도 하고, 특히 어미 멧돼지들은 새끼를 노리고 덤벼드는 천적들을 목숨걸고 쫓아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새끼부터 성체까지 사방이 천적입니다. 적은 땅에만 있는게 아니거든요. 독수리가 빠른 속도로 이동하던 혹멧돼지 가족을 공중에서 전광석화의 속도로 강습해 사냥에 성공하는 Last Sightings의 동영상입니다.
https://tv.kakao.com/v/430174046
이렇게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의 드라마가 쉴새없이 쓰여지면서 라이온킹 오프닝곡의 제목이기도 한 생명의 바퀴는 끊임없이 굴러갑니다. 그 동력원중의 하나는 혹멧돼지들을 비롯한 생태계 하위를 이루는 약자들의 처절한 희생이겠죠.
ⓒ 조선일보
'동물의 세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백산에 방사한 2살 여우…홀로 동해→태백산맥→부산 여행 (0) | 2022.07.08 |
---|---|
[프리미엄][수요동물원] 멸망의 징조인가…거대 괴물달팽이의 습격 (0) | 2022.07.06 |
“사람 탈 쓴 거 아니야?” 방콕 오랑우탄의 ‘나쁜 손’ (0) | 2022.07.03 |
독사에 물려 은퇴한 인명구조견, 길 잃은 할머니 찾아 '뭉클'[펫톡톡] (0) | 2022.07.01 |
코로나로 야생동물 늘었다…‘도심 속 동물 사진 어워즈 11' (0) | 2022.06.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