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창고 꽉채운 339개 고기덩어리..'바다의 로또' 슬픈 운명[e슐랭 토크]
백경서지난 3일 오후 6시쯤 경북 포항의 포항구항. 주변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포항해양경찰서 소속 형사 9명과 구조대 3명이 항구로 모였다. 조심스럽게 구조정에 탑승한 이들은 불을 끄고 숨을 죽인 채 누군가를 기다렸다.
울산 남구 장생포 고래문화특구 내 고래문화마을에서 볼 수 있는 고래해체장 모형. 울산=백경서 기자
3시간이 지난 오후 9시쯤. 바다 쪽에서 어선 한 척이 포항구항쪽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포착됐다. 형사들을 태운 구조정은 급히 9.77t 어선 A호 쪽으로 향했다. 당황한 A호가 배를 돌리려 할 때 "배 세워!"라는 소리가 들렸다. 해경이 불을 비추며 정지 명령을 내리자 A호는 구조정을 따라 뭍으로 향했다.
A호에 오른 해경들은 배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배의 바닥 창고를 열어보니 밧줄 등 포획 도구와 함께 초록색 그물 더미가 발견됐다. 수상쩍은 그물을 치운 해경은 눈앞에 펼쳐진 모습에 넋을 잃었다. 그물 뒤에 숨겨진 또 다른 창고 안에 조각난 밍크고래가 빼곡히 쌓여 있어서다. 이날 해경이 적발한 밍크고래는 총 339조각, 모두 4마리로 추산된다. 시가 총 6억 원가량으로, 단일 사건으로는 역대 최대 수량이라는 게 해경의 설명이다.
밍크 고래는 이른바 ‘바다의 로또’라고 불린다. 우연히 그물에 걸려 위판장에 나온 밍크고래의 경우 신선도나 크기에 따라 최대 1억 원에 팔리기도 한다.
경북 포항해양경찰서가 지난 3일 불법 포획한 고래를 운반한 9.77t급 어선 선장 A씨와 선원 등 모두 5명을 체포해 수사하고 있다. [사진 포항해양경찰서]현재 국내에는 80여 개의 음식점에서 고래 고기를 팔고 있다. 현재 울산 장생포항에 20여 개, 포항 구룡포에 10여 개 등이 있다.
울산 장생포항에 있는 고래고기 음식점에서는 고래로 만든 수육, 오베기, 우네, 육회, 막찍기, 찌개, 곰탕 등을 먹을 수 있다. ‘원조할매집’의 윤경태 대표는 “한 자리에서만 3대가 70여 년에 걸쳐 고래고기 맛을 지켜왔다”며 “고래 고기 특유의 고소하고 쫄깃한 맛을 느끼려는 미식가들이 전국에서 찾는다”고 말했다.
고래고기는 단백질·칼슘·인·철·비타민 등이 풍부해서 어린이 성장 발육에 좋고 성인병 예방에 도움이 된다. 또 젤라틴 성분도 있어 피부 미용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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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고래 포획이 금지되기 전에 이뤄졌던 고래 잡이. 울산 장생포항에 대양호가 포획한 북방 긴수염 고래가 등장했다. [출처 장생포고래문화마을]
고래잡이, 1986년 전까지 동해안서 성행
하지만 현행법상 고래를 포획하는 건 불법이다. 고래 중에서도 밍크고래 등 일부 고래만 그물에 걸렸거나(혼획), 해안가로 떠밀려 오거나(좌초), 죽어서 해상에 떠다니는(표류) 경우 잡아서 해경에 신고한 뒤 판매할 수 있다.
해경은 고래가 잡혔다는 신고가 들어오면 불법 포획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먼저 검시를 한다. 1~2시간 검시를 거쳐 불법 포획흔적이 없고 금속 탐지작업을 했을 때 작살 조각 등이 탐지되지 않으면 고래유통 증명서를 발급한다. 이후 수협 위판장에서 거래된다.
해경은 “이날 밤 (A호가) 밍크고래를 몰래 들여올 예정”이라는 첩보를 입수하고 한 달 전부터 수사를 벌여왔다. 검거 당시 형사기동정을 타고 접근할 경우 A호가 눈치를 채고 도주할 수 있어 구조대에 구조정을 빌리는 등 치밀한 계획도 세웠다.
울산 반구대암각화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바위에 새긴 그림이다. [사진 연합뉴스] 반구대암각화에 그려진 고래 그림들. 반구대암각화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보기 쉽도록 자세히 표현해 설명했다. [사진 반구대암각화 홈페이지]해경은 A호 선장(56·구속) 등 선원 5명을 수산자원관리법위반 혐의로 현장에서 체포해 수사를 벌였다. 아울러 밍크고래를 잡아 A호로 넘겨 준 포획선에 대한 추적에 나섰다.
현행법상 불법 포획한 고래를 운반하면 수산자원관리법에 따라 2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포항해양경찰서 관계자는 “불법 포획된 밍크고래는 음식점 등에 유통할 수 없고 전량 폐기 처분된다”고 말했다.
고래사냥이 애초부터 불법이었던 건 아니다. 우리나라 고래사냥의 역사는 선사시대부터 기록돼 왔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래사냥 모습이 새겨진 국보 285호 반구대암각화가 대표적이다. 울산 울주군에 있는 반구대암각화에는 태평양 연안을 무대로 고래를 사냥했던 신석기시대의 포경(捕鯨·고래잡이) 활동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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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고기 모듬. [사진 울산역사문화대전]
고래고기 음식점, 전국 80개…미식가들 몰려
울산반구대암각화박물관에 따르면 이 그림에서 확인되는 고래종은 향고래·귀신고래·범고래 등 최소 7종이다. 암각화에는 고래 주위에 모여든 새를 통해 멀리서 고래의 출현을 탐지하는 탐색 작업, 작살로 고래를 사냥하는 장면, 죽은 고래를 인양하는 모습, 배를 뒤집고 죽은 고래를 해체하는 장면 등이 새겨져 있다.
포경업은 이후 농업의 발달 등에 따라 쇠퇴하기 시작했다. 우연히 좌초된 고래 등을 잡을 뿐 조직적인 포경업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그러다 1899년 러시아가 울산 장생포에 포경기지를 세우면서 포항 구룡포를 비롯한 동해안을 중심으로 포경업이 활기를 띠었다.
지난 3일 경북 포항구항 인근 해상서 포항해경이 고래 불법 포획 선박에 다가가고 있다. [사진 포항해양경찰서]고래잡이는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IWC) 협약에 따라 금지됐다. 이후 정부는 2008년 울산 남구 장생포 지역을 고래문화특구로 지정했다.
고래문화특구에는 장생포 고래박물관, 고래문화마을, 고래생태체험관 등이 조성돼 있다. 고래바다여행선에 탑승해 참돌고래 등 고래를 만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있다.
포항=백경서 기자 baek.kyungse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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