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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6.25사변, 9.28수복, 1.4후퇴 450km적진 탈출기

레이찰스 2022. 2. 14. 19:39

내가 겪은 6.25사변, 9.28수복, 1.4후퇴  450km적진 탈출기

 

내가 겪은 6.25사변, 9.28수복, 1.4후퇴 450km 적진 탈출기

 

 첫 머리에...

 

2015년 봄, 동네 친구와 감천 천마산을 산행하고 남포동으로 내려가 부산극장에서

상영중인 '국제시장'을 관람 하였습니다. 마치 나의 어린시절을 보는것 같았습니다.

사실 우리동기들은 수년전에 어릴적 겪은 6.25를 글로쓴 친구도 있었습니다.

그것을 읽었을때 나의 느낌은 그들이 당한 어릴적의 6.25는 나의 경우에 비하면 너무나도

상이하고 힘들이지 않고 넘겼다고 느꼈습니다. 함흥에서 배를타고 거제도로 갔기 때문이

겠지요. 그래서 나도 언젠가 내가 겪은 사선을 넘어 35일간에 걸쳐 450km가 넘는 피난길과

약 200일 간의 적지에서 생활한 6.25사변부터 9.28서울 수복과 1.4후퇴시 부산까지 걸어오며

겪은 적지에서의 탈출기를 글로써서 발표 하리라 마음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생각일뿐

세월만 보내다가 최근들어 어렸을때 영도에서 학교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를 동기 홈피에

발표한후 주위에서 이왕 손 대었으면 내친김에 자서전을 한번 써 보는것은 어떻겠느냐??

하는 친구들의 부축임을 토대로 하여 옛 기억을 되살려 필을 들기 시작 하였습니다.

6.25의 역사적이거나 정치적인 기록등은 배제하고 실지 내가 겪은 사실에 집중 하여 기록을

남기고져 합니다.       71살의 나이에 65년전의 6살때 기억을 되 살리기는 쉬운일 만은

아니었습니다 . 아마도 5월경 공개가 가능 하도록 쓰고 있습니다.

기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2015년 이름다운 봄날에-    海  園      羅    哲    秀

 

1950.6.25 사변

나는 1945.1월 만주의 북간도에서 태어났다고 할머니가 알려 주셨다. 나는

3살때부터 내주위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억하고 있다. 어려서 부터 어머니는

계시지 않았다.    아버지는 가끔 집에 와서 할머니를 만나고는 어딘가 로

떠나셨다. 그러다 몇달후에 돌아와서는 할머니를 만나고는 바로 나가셨다.

나는 어린시절을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만주에서 태어난 나는 함경북도 회령궁 회령읍 2동 284번지가 나의 원적지

이다.    할머니가 들려준 얘기로는 우리 가족이 만주에 간것은 할아버지가

독립군에 들어가면서 부터 할머니와 아버지등 모두가 만주에 살게된 사유라고

들었다. 그러다가 해방을 맞아 서울로 와서 살게 되었고 내가 6살 되든해인

1950년  6.25 사변이 일어났다.

 

 

 

 (1950.6.25.탱크를 앞세우고 북한군이 미아리 고개를 넘어 서울시가지에 침입 하였다)

 

당시 우리집은 남산밑의 장춘단 공원옆에 살고 있었다. 아침부터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끊임없이 계속해서 울려대며 군용차량이 라이트를 켠채로 시내를 질주

하고 다녔다.     할머니에게 물어봐도 왜?그러는지 모르겠다며 대답을 못하신다.

그날 늦은 오후에 38선을 넘어서 북한군이 처내려 온다며 피란을 가라는 방송이

나왔다며 할머니는 안절부절해 하신다.   아버지는 젊은 나이로 북한군에 잡히면

군대에 끌려 가야하니 집에도 들어오지 않고 할머니에게는 먼저 부산으로 피신

간다고 하며 집을 떠났다고 했다.  그러나 늙으사람들과 애들은  친척이나 연고가

있는 사람들은 피란을 갔지만  사실은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남으로 쳐내려

온다고 하지만 전쟁이 얼마나 갈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가옥과 재산을 버린채 ..

연고지도 없는데... 어디로 갈수 있었겠는가??

 

 

 

 

 

결국 할머니와 나는 피란을 가지 못 하였다. 그리고 27일 북한군이 우이동 고개를

넘어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았고 , 28일 아침 하늘에는 북한 전투기가 서울상공을

날고 중무장한 탱크를 앞세우고 북한군이 서울로 들어왔다. 그날 저녁이었다. 

붉은 완장을 찬 북한군 3명과 이웃집에 살며 동네에서 말썽꾸러기로 불리던

아저씨가 마을을 돌아 다니며 젊은이들이 있는지 찾아 다녔고...우리집에도 몰려왔다.        

내가대문을 열고 이들을 맞으니 대뜸 붉은 완장을찬 북한 군인이  "너 아바지 어드메 있니??

하며 아버지를 찾는다.  "아버지 어디 계신지 몰라요." 하니 군화도 벗지않고 우리집 아랫방

3개와 2층으로 올라가서 방2개를 뒤진후 할머니외에는 아버지는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후에도 이들은 수시로 한밤중에도 아버지를 찾으러 왔다 갔다.  

아버지를 찾지 못하자 거의 매일 할머니는 저녁마다 끌려서 다음날 아침에야

돌아 왔는데 그때마다  할머니는 코피가 터져 돌아와  할머니에게  물었더니 

아버지를 찾아 오라고 밤새 폭행을 당했다고 했다.   내가 할머니에게 

들은 얘기로는 당시에 아버지는 중국에 오래살아 중국말을 잘해 상해나 홍콩

등지로 다니며 무역을 했다고 들었다. 우리집은 2층양옥집으로 1층 목욕탕에는

당시 몸이 약한 나의 보신용으로 자라를 기르기도 하였고 그어린 나이에 웅담과

녹용을 먹었던 것을 기억한다.      당시 우리집 앞에는 동사무소가 있었고 크고

높은 철재 국기봉에 태극기가 달린채 밑에서 줄을 끊고 피란 가버려 오랫동안

그태극기는 계양되어 있었다. 서울시내는 젊은사람들은  대부분 피란을 가버려

남아있는 애들과 평소에 들어가보지 못하던 동네 빈집에 들어갔더니 유리구슬과

인형,장닌감등이 있어 이것을 갖고 나와 같이 놀기도 하였다.   우리집옆에는  병원이 

있었는데 동네 아이들과 들어갔더니 알코홀 병에넣은 애기들이 보였다.

 

 

 

 

 (미쳐 피란가지 못한 젊은이들이 북한군에 잡혀  훈련을 받고있는 장면)

 

 

그해 여름이 지나고 가을로 접어 들무렵 한밤중에 고막을 찟는듯한 북한제 

전투기와는 다른 비행체가 서울 상공에 높히 날으며  이어 조명탄이 하늘에서

내려오며 동네가 마치 한낮같이 밝아졌다.

할머니와 자던 한밤중에 조명탄으로 창문밖이 너무 밝게 비쳐 잠을 깼는데 ...

조금 후부터 고막을 찟는듯한 비행체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꽝~~ 꽝~~ 하며

폭탄 터지는 소리가 여기저기 사방에서 들리며 포탄이 터질때마다 지축을 흔드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우리집 근처에 여러발의 포탄이 떨어진듯 하였다.

 

겁이나서 밖에 나가 보지 못 하였다. 다음날 아침 집앞에 나가보니 이웃에사는

애들이 집앞 방공호에서 나오는것을 보았고 나중에는 그들이 지난밤 이 방공호

에서 북한군들과 같이 밤을샜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장충단 공원주위에 있는 가옥들이 지난밤 폭탄에 맞아 불타고 있었다.   나중에

내가 알게된사실은 북한군이 제일 무서워하는 미국의 B-29 비행기는 부정기적

으로 며칠에 한번씩 폭격을 하였다.

 

 

 

 (9.28서울 수복 작전에 투입된 UN군 병사들이 북한군과 시가전을 벌이고 있다)

 

1950.9.28수복

 

UN군의 서울 시가지 폭격이 밤과 낮으로 거의 매일 있었고 그러다 어느날 아침

여늬때와 마찬가지로 방공호로 갔는데....북한군이 한명도 안 보인다 .이상하다고

느끼는데...   그들이 아지트로 쓰던 동 사무소에 가보니 여기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무슨일이 일어 난것일까?

그날오후 을지로쪽 대로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만세를 부루며 군인들과 같이 행진

하며 오는데...    가까이 와서 보니 이 군인들은 생전 처음보는 깜둥이들 이지

않는가!!!   생전 처음보는 흑인들이었다. 키는 엄청 컸으며 완전 군장을 하고

총을 멨는데...검은 피부색에 하얀 잇발을 내 보이고 웃으며 껌을 씹으며 행진

하여 남산으로 올라 가는것 이었다.   그날밤 날이 어두워지자 이곳저곳에서

총쏘는 소리가 들린다.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한 UN군이 서울에 입성하여 남산으로 오르고 있다)

 

 

미쳐 도망치지 못한 북괴군과 UN군이 시가전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도 그날

하루가 지난 다음에는 일어 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북한군이 패전하여 북으로

간 이후 서울에도 짧은 평화가 오고 몇몇 않되는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남산으로

올라 가보았습니다.       여기저기에 파괴된 북한제 탱크가 널려 있었고 이것이

아이들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길거리에는 포탄의 탄피와 화약이 널부러져 있었고

밤에는 모닥불 피워 화약을 거기에 넣으면 폭발 하는것을 보고 아이들이랑 재미

있어 하며 놀았습니다.

 

 (북한군이 물러간후 파괴된 전차는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1951.1.4후퇴

 

그러나 이러한 자유의 시간도 오래도록 주어지지는 않았다.    때는 가을을지나 추운

겨울로 접어 들었고 밤낮을 가리지 않는 전투가 오래도록 계속 되더니

어느날밤  서울은 다시 북괴군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다. 6.25때 피란가지 못했던 

이웃사람들도 이때 다시 피란을 가기 시작 했다. 며칠이 지난후 UN군의 야간 서울 폭격은

다시 시작 되었고...

북괴군들이  다시 우리집에 찾아와서 아버지 찾아 오라며 할머니를 데리고 갔다. 

다음날 아침에 돌아온 할머니는 밤새 폭행을 당하여 온몸에 피투성이 였다 

 (할머니와 피란길에 오른 어린이가 할머니의 부축을 받고있다)

 

추운 어느날밤 오바를 입고 자는데 조명탄이 터진다. 내가 할머니 보고 "할머니

빨리 방공호 가요" 하니 할머니가 "너나 가거라. 나는 집 보고 있을께" 하였다.

사실 서울 시민들이 모두 피란간후 북한군은 빈 가정집을 돌며 피란시 미쳐 가지

못한 물품들을 노략질하고 있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집을보고 있겠다고 하신

것이다. 나는 혼자 조명탄으로 훤히 밝혀진 길을 건너 방공호로 뛰어갔다.

방공호속에는 북한군과 이웃사람들이 여러명 있었다. 방공호속에서 북한군과

하룻밤을 새우다 보니 그들의 나이는 15~6세 정도로 젊은이들 이었다. 이어

엄청난 UN군의 폭격이 시작 되었고 엄청난 폭격은 밤새도록 이어졌다.

밤새 한잠도 눈을 부쳐 보지 못했지만 홀로 집을 보고계신 할머니 안전이 걱정이

우선 이였다. 방공호 바로 앞에있는 우리집 근처에서  엄청난 폭발음이 들려왔다.

 

 

 (B-29의 폭격으로 시가지가 불타고 있다.)

 

 

다음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방공호를 나와 집으로 가는데 이곳저곳에서 폭격

으로 화재가 나고 있었고 우리집은 다행히 화재는 나지않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집앞까지 뛰어갔는데 ...전면 현관위쪽 2층 기와지붕이 파손되어 커다란

구멍이 나있는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면... 불길한 생각을 하며 방으로 뛰어

들어가며 "할머니~" 하고 불렀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방 밖으로 나오시며 "나는

괞찮다. 폭격 때문에 밤새 한잠도 못잤다"라고 하시었다. 나는 할머니 품속으로

뛰어 들었다.    1층 마루 바닥에 커다란 폭탄이 2층 지붕을 뚫고 떨어져 박혀

있었다. 폭발하지 못한 불발탄이었다. 포탄은 마치 동네시장터  새우젖가계에서

보던 새우젖독과 비슷하게 생겼었다. 지금도 생각난다. 그당시 할머니 연세가

60이전 이었을 텐데 밤새엄청난 폭격속에서 얼마나 무서 웠을까?? 그리고 만약

 불발탄이 폭발 하였다면 ...적지에 홀로 남겨진 나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참으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이사건이 있은후 어느날 괴뢰군 2명이 우리집에 들어와 할머니를 데리고 나갔다.

내가 딸아 가려했더니 괴뢰군이 나를 발로차며  못오게 하고 할머니만 데리고 갔다.

할머니가 돌아온것은 3일후였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부산으로 피란갔다고 했는데도

아버지 숨긴곳을 대라고 하며 구둣발로 할머니를 마구차서 할머니 몸에는 상처와

온몸에 시퍼런 멍 투성이 였다. 나는 여러번 할머니에게 "할머니 우리도 부산으로

피란가요" 하였고 할머니도 이에 응하여  1월 15일경 부산으로 피란을 시작 했다.

장춘단에서 청계천변을 따라 종로2가 까지 오는 도중에 본 시체는 북한군,

중공군,우리국군과 서울시민 등 수천구의 시체를 보았다.   어린 나이에 그토록

많은 시신을 처음 본것 이다. 종로에서 마포나루 까지가서 하룻밤 남의 부억방

에서 보내고 추워서 얼어붙은 한강을 걸어서 건너며 6.25때 폭파하여 파손된

한강교를 볼수 있었다.

 

 (청계천변의 수많은 시체들...)

 

마포 나룻터나 영등포 나룻터인근 에도 민간인들과 국군의 시신들이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었다.    여기서 수원 발안역까지 기차길이 폭파된후 기차가

다니지 못하여 걸어 가야만 했다.    발안역 인근에 발안장이 서는날이라 여기서

주먹밥과 내일 이동하며 먹을 주먹밥까지 얻어 왔다. 사실은 여기까지 오면

부산까지 가는 군용열차를 얻어 탈수 있다는 피란민들간에 오가는 정보를 갖고

여기까지 왔는데... 어제밤 야간 폭격으로 기찻길이 파손되어 열차가 다닐수 없게

됬다는 얘기로 할머니와 다시 걸어서 이동을 합니다.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가는 피란행렬뒤로 파괴된 한강 철교가 보인다)

 

 

이른 아침 출발하여 하루가 다 지나고 다음날 저녁 늦게서야 오산에 도착

하였다.    그당시 신고 다녔던 검정 고무신이 다 닳아 할머니가 고무신을

굵은실로 꿔매 주셨다. 제대로된 양말도 없이 광목으로 붕대같이 잘라 발을

감싸서 묶고 다녔다. 그래도 오늘은 운이 좋은날 이었다. 반나절 가량

되는 거리를 같이 피란가는 사람의 소달구지를 얻어타는 행운을 얻었다. 

피란민들은 평택까지 가면 거기서 군용 열차를 탈수 있을것이라고 하였다.

낮에는 북한군 전투기가 정찰 하는듯 낮게뜨며 지나 가는것을 보았다.

 

 

 

 (북한군의 전투복장을 보면 그들이  남한 침공을 위해 사전 준비해 왔음을 보여준다)

 

피란행열 뒤쪽 멀리에서 폭탄이 터지는 굉음도 들렸다. 그리고 가끔은 미군

차량이 군인들과 장비를 가득싣고 지나 갔지만 피란민은 태워주지는 않았다.

할머니가 마을에 가시더니 식은밥 한그릇을 얻어와서 식사를 할수 있었다.

오늘도 피란가고 비어있는 농가의 빈축사에서 여러 피란민들과 하룻밤을 새웠

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온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것은 엄청난 폭설

이었다. 신발도 다떨어 졌는데...   할머니는 피란행열을 뒤로한채  시장에

신발사러 갔습니다.

 

 

(엄청 많은 눈이내린 피란길 행렬)

 

신발을 바꿔신고 평택을 향해 걸어 가는데 ...큰길옆에 군인들이 타고가던 차량이

북한군의 전투기 공격을 받았나 봅니다. 차는 불타고 십여명은 사망하고 부상자

세명이 보였다. 하지만 주위에 사람도 없이 할머니와 6살배기인 내가 그들을

위해 해줄것은 하나도 없었다.

어느날 피란민들이 자그마한 기차역에 군용화물 기차가 멎어 있었는데.. 그 부근

에서 날이 어둡기를 기다렸고 야밤을 이용하여 피란민 모두는 군용 화물 열차에

숨어 들었습니다. 그러나 한두명도 아니고 많은 피란민들이라 결국 미군들에게

발각되었고 드디어 후라쉬를 켜고 나타난것은 수십명의 미군 이었습니다. 그들은

이곳 저곳에 숨어있는 피란민들을 기차에서 쫓아 내었다.

  

 

 

 

어렸을적엔 몰랐었는데... 그들이 한말은 " Get danm!! Sun of bitch!!" 였습니다

거의 대부분 피란민들은 기차에서 좇겨 났습니다.   한밤중에 기차에서 쫓겨난

피란민들은 그시간에 들어 갈곳도 없고...피란 행낭을 메고 남으로..남으로 ...

이동을 합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할머니와 나는 평택의 외곽에 도착

했습니다. 며칠전까지는 우리국군을 볼수 있었는데 여기에서는 북한군만 보였다.

오늘도 여늬때와 마찬가지로 빈 농가에 하루를 묵고 가야 합니다.

 

 

 (피란민을 태운 열차광경)

 

할머니는 마을로 밥 얻으러 가고 나는 땔감을 구하러 지게지고 산으로 갔다

마른 나무가지를 주워 집으로 오는 도중에...   마을 사람이 UN군 폭격을 피하기

위해 다리에 위장용으로 덮어놓은 소나무 가지를 벗겨 모아 지게에 메고 나와

같이  몇걸음 걸으며 같이 가는데....     이때 갑자기 북한군이 나타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메고있던 따발총으로 그사람을 여러발 쏴서 죽여 버렸습니다.

나는 얼떨결에 등에 메고 있던 지게를 버리고 길가옆 빈집에 들어가 숨어 있었다.

얼마후 총소리를 들은 동네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들고 나도 거기에 가 보았다.

어느 아낙네가 "영길이 아버지 ! 이게 웬일이요? 나무하러 산에 간다더니...

이게 웬일이요?? " 하고 울며 북한군에게 따지자 북한군 하는말이 "우리가 작전용으로

다리를 위장해 놓았는데 이 반동 분자가 위장한  소나무를 벗겨 갖고 가길래 쏴서 죽였다"

 고 하였다. 이사건 이후로 할머니는 내게 산에가서 땔감 나무는 준비하지 말라고 하였다.

 

 

 (북한군은 죄없는 많은 민간인들을 사살 하였다)

 

 

당시 평택 인근은 남하하는 북한군과 후퇴하며 방어하는 국군들의 전투로 밤과

낮이 교차하듯 평택의 주둔군도 밤낮으로 바뀌었다. 아무래도 기차는 얻어타기

어려워 졌다고 피란민들이 얘기 했다.

천안까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추운겨울 눈까지 내려 온통 얼어붇은 땅위를

고무신 하나 신고 것는것이 몹씨도 힘들었지만 어린 나이인 내 생각에도 내가

걷지 못하면 죽는다는 하나의 생각뿐 이었다.  나는 살기위해 하루에 30~40리

되는 눈길을 걸어야만 했다. 멀리 군용기차가 지나가는것이 보인다.    이름모를

장비들이 가득 실려있다.    피란민들이 지나가는 길옆에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주먹밥을 만들며 갖고와서 나누어준다.    피란민들은  삼시세끼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채 우리는 살려고 피란 가는데 저사람들은 왜 피란 가지않고 저러는지

알수가 없었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이 고맙다.  산길을 넘어 멀리 아래쪽으로 큰동네가

보인다.

 

 

 (UN군의 쌕쌔기 공격받고 파괴된 북한 탱크와  북한군 시신들)

 

지축을 흔드는것 같은 굉음을 내며 북한 전투기가 지나간다.    멀리 뒤쪽에서

쏘는 소리가 들린다. 폭탄이 터지는 소리도 들린다.     우리는 빨리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피곤한것도 느낄새도 없이 걷고 또 걸었다.     시내에 들어오자

여기저기에 폭탄을 투하한듯 불타는 건물이 수십채나 되었고 곳곳에 시신과

부상자를 많이 볼수 있었다.    시내를 벗어나 다시 산길로 접어드는데 아침

무렵에 지나간 기차가 폭격을 맞아 철로와 기차가 파괴되고 불붙고 있는 기차

주위와 선로 주변에도 시신과 부상자가 여럿 보였다.

 

 

 (군용 열차가 북한 전투기 공격을 받고 불타는 광경)

 

 

우리는 목적지를 부산으로하여 무조건 남쪽으로 가면 살수있을것으로 믿고

피란을 가는데...몇시간 동안 가는데 이번에는 우리의 앞쪽에서 국군과 북한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서 할머니와 나는 갈 방향을 잃고 말았습니다. 뒤에서도

그리고 앞에서도 전투가 벌어 졌으니 피란민들은 갈곳이 없었다. 피란민들은

길옆의 빈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날밤 쌍방의 엄청난 전투가 밤을 새며

벌어 졌습니다. 그야말로 전쟁영화 보는것 같았다. 하늘높이 날아온 미국의 B-

29 에서는 조명탄과 포탄이 떨어지고 육상에서는 총알과 포탄이 날아가는 전쟁터

에는 화약냄새와 연기가 자욱했고 여기 저기에 시체가 딩굴고,..마치 지옥을

보는듯 하였다.

 

 

 (UN군 쌕쌔기들이 북한군 침공 지역에 포탄을 투하하는 장면)

 

우선 산쪽으로 달려가 방공호를 발견하고 들어갔더니 그곳에는 피란민보다

중공군이 더 많이 있었다.   세상나고 중공군을 처음본 것이다. 너무나도

전투가 치열하여 그방공호에서 여러날 대기하며 있었다.    여러날을 같은

방공호에 있으며 그들을 보니 그들도 나이가 15~6세 정도되는 젊은이들

이었다. 그들이 빈 민가에 가서 장난감과 인형들을 방공호로 가져와서 같이

갖고 놀기도 하였다. 언젠가는 궁공군들이 나무로 말목을 만들어 말목위에

올라가서 춤추는 장면을 목격 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UN군의 공습으로 낮에는

방공호에서 자고 해만 지면 전투를 하였다.   

낮에는 공습으로 밤에는 전투로 피란민들은 어디로가야하는지 방향도 잡지

못하였다. 오랜 동안을 북한군,중공군들과 같은 방공호속에서 지냈습니다.

 

 

 
(북한군 탱크를 공격하는 UN군 쌕쌔기들의 기총소사 광경)

 

 

산속길로 피란가는것이 공습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피란민들의 주장으로 대로변

이나 강가를 이용하여 이동하기 시작 하였다.  옥천부근의 강가에도 군인들

시신으로 가득 하였고 폭격맞아 불타버린 탱크와 차량들도 많이 보였다.

산속을 걸을때에는 추운줄 몰랐는데.. 강가를 걷고 얼어붙은 강을 건너기도

하니 너무나도 추웠다. 그날 오후 할머니가 몸이 불편한듯 걸음걸이가

전과 다름을 느꼈다. 할머니 이마를 만저보니 불덩이같이 뜨거웠다.

아마도 독한 감기에 걸리신듯 하였다.   강가의 나루터옆에 빈집이 있어 거기에

들어가  땔감 나무를 준비하고 방에 불을 피운후 나는 둑 넘어 마을로 밥을 동냥

하러 갔습니다.

 

 

 (끝도없이 연결된 피란 행렬)

 

동네 아주머니에게 "할머니와 피란중이고 감기에 걸려 밥을 짓지 못하니 먹을것

있으면 조금 주세요" 하니 아주머니는 식은밥과 김치까지 주시더니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나오시더니 약봉지를 내게 주셨다. 내가 찾아간집이 그동네의 약방

이었다. 아주머니는 내게 "어린 나이에 할머니랑 피란 가느라 고생이 많구나,

이것으로 할머니에게 따뜻한 죽을 쑤어 드시게 해라" 고 하시었다.

고마운 아주머니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할머니 계신곳까지 단숨에뛰어 왔다.

사흘뒤 할머니는 감기에 차도를 보이면서 나와같이 엊그제 그 아주머니를 찾아가서

고맙다는 인사를 한뒤 다시 피란민들의 행열로 들어 갔습니다.

 

  

  (동네사람들이 길가에 나와 주먹밥을 지어 피란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있다)

 

우리 피란민들은 낙동강을 끼고 이동하는데 저 멀리 큰 다리가 보이고 그 다리를

사이에 두고 양쪽 둑방에서 지금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피란민들도

그 다리를 건너 가려고 작정하고 이곳까지 왔는데 피란민들은 전쟁터를 우회해서

돌아가자고 뜻을 모은뒤 다시 산을 넘어 남으로 남으로 이동을 계속 하였다.

강기슭을 떠나 산속으로 들어온지 이틀이 지나가는데 이곳은 온통 눈덮힌 산으로

둘러 쌓여 있었다. 여기서도 치열했던 전투의 흔적이 많이 보였다.  도로옆

개울에는 시체가 즐비 하였고 여기에도 부서진 탱크와 군용차량이 많이 보였

습니다. 가까이 보이는 산 능선에는 추락하여 부서진 미그 전투기도 보였다.

 

 

 (피란길에는 소 달구지도 이용 되었다)

 

이곳은 산속이라 민가도 보이지 않고 ...눈이 녹지않아 너무나도  추웠다.

큰 고개의 모퉁이를 돌아가니 다행스럽게도 저멀리 아랫쪽에 보이는 마을에 저녁

6시경 도착 했다. 마을은 꽤나 커 보였다. 빈집도 여럿 보였다. 동네

사림들에게 물어보니 여기서 반나절 아랬쪽에 김천이 있다고 했습니다. 서울을

떠난지 보름만에 여기까지 온것 입니다. 동네 사람들도 무척 친절 하였다.

한방에 피란민들이 10명정도 같이 기거 하는데....마을 사람들이 땔감 나무와

주먹밥까지 만들어 갖고 찾아 오셨습니다.

 

 

  

 

낙동강을 끼고 아래로 남하 하는데 여기서도 강을 사이에 두고 양쪽 둑방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피란민들 얘기로는 왜관근처까지 왔을것

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다시 산속으로 우회하기로 뜻을 모으고 산속으로

들어 갑니다.   강을 끼고있는 산을 능선을 타며 강을 내려다 보며 남으로 이동

합니다. 아랫쪽에서는 총소리가 마치 콩 볶는소리 비슷하게 들립니다.   따발총

소리까지...   이때 굉음을 내며 우리가 가는 능선 바로위로 미그기가 낮게 날아

옵니다. 우리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풀속으로 바짝 엎드렸습니다.

 

 

(산등성이에서 본  북한 전투기의 시가지 폭격 장면)

 

전투기는 가지않고 한바퀴 우회하며 다시 우리에게 가까이 옵니다.    피란민

모두는 풀섶으로 몸을 숨깁니다. 산속에서는 너무추워 밤을 샐수는 없었다.   

해지기전까지 민가에 도착 해야 하는데....   걸음을 재촉하며 이동 하는데 계곡

아래쪽에 커다란 축사가 눈에 들어 왔다.      그러면 멀지않은곳에 민가도

있을것이다. 피란민들의 추측은 그대로 적중 하였다. 할머니와 나는 민가로..

나머지 피란민들은 축사에서 밤을 새기로 하였다.   산속이라 땔감 나무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날밤에도 UN군의 공습은 있었지만 폭격지점은 아래쪽

마을인듯 하였다.   밤이새도록 전투는 계속 되었고 피란민들은 전투가 끝나면

이동하자고 하였다.

 

 

 

이렇게 산속에서 사흘을 지내고 먹을것이 없어서 피란민 한명이 아래쪽 마을로

양식을 구하러 내려갔다 돌아왔다.       이사람 말로는 아래 마을에 내려가보니

온 동네가 폭격과 전투로 폐허가 되었고 빈집에 들어가서 쌀과 옥수수를 가지고

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산에서 식사를 마치고 마을로 내려 왔는데 마을에는 산사람은 없고 시체

들로만 가득 하였다. 다리도 폭격으로 절단되어 있어 피란민들은 강을끼고

다시 아래로 이동을 시작 하였다.

 

 

 (피란민 수용촌 모습)

 

며칠이 지난후 우리가 지나가는 마을은 아주 평화 로워 보였다. 불과 며칠

사이인데....       북한군도. 중공군도 보이지 않고 북한 전투기들도 보이지

않았다.      가끔 지나가는 군용차량을 타고 지나가는 우리 국군들만 보였

습니다.       그리고 며칠후 할머니와 나는 서울을 떠난지 30일만인 2월15일에

대구에 도착 하였다.     거의 300km가 되는 거리를 30일만에 걸어서 도착

 것이다.  여기는 전쟁과는 거리가 먼 완전 후방이었다. 대구에서 며칠

묵은후 다시 부산으로 가기위해 하루 걸려 걸어서 도착한곳은 경산이었다.

여기서 군용트럭을 얻어타고 밀양에 도착하였고 피란민들이 수소문한 정보로는

내일 이곳에서 부산가는 군용 트럭이 있다고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군부대에서

트럭을 타고 부산 구포에 저녁무렵 도착 하였다.    1월15일 서울을 떠난지

35일만인 1951년 2월 20일 할머니와 나는 부산에 도착 한것이다.

 

 

(산기슭의 피란   움막촌 )

 

구포 낙동강가 둑방아래 허름한 판자집을 얻어 거기에 행낭을 풀고 할머니는

매일 아침 나를 집에둔채 외출나가셨다가 거의 어두운 저녁에 돌아 오셨습니다

할머니에게 물어보니 아버지를 찾아 영도다리앞에 갔다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할머니 얘기로는 6.25아침 당시에 30세의 젊은 나이인 아버지는 적군에 잡히면

군대로 끌려가야 하기때문에 먼저 부산으로 단신 피란가고 후일 전쟁이 끝난후

할머니와 내가 부산오면  영도다리앞에서 만나자고 했답니다.     그렇게 하기를

일주일째 되는날 할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저녁에 돌아 오셨습니다.    어릴적이

었지만 나는 아버지 얼굴을 본것이 몇번 되지않아 부자지간의 정이란것도 느끼지

못하고 살아 왔다.    피란시에도 밤에 자다가 조명탄이 터지고 포탄이 떨어

져도 내가 숨을곳은 할머니 품속밖에 없었다.

 

 

 

(대청동 산기슭에 지은 피란민  보호소 건물) 

 

일단 아버지는 할머니와 나를 데리고 40계단위 동광동에 있는 아버지의 거처로

이사를 하였다. 당시는 전시라 서울에서 단신으로 먼저 피란온 아버지는

매일아침 집을 나갔지만 직장은 잡지 못한듯 하였다.

 

 

 

 

1951.3.15.국군 서울 재 탈환  북진

 

1.4 후퇴로 생겨난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계속 몰려드는 바람에 1951년 3월

부산의 인구가 120만 명을 넘어서게 된다. 이때는 거리, 골목 구석마다 사람이

빼곡히 차 있어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정부는 전국 곳곳에

피난민 수용소를 만들어 피난민들을 수용하려 했으나 이도 역부족이었다고

한다.국군과 UN군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1951.3.15. 서울을 재 탈환 하였고

현재의 3.8선까지 진격 하였으나  UN군의 참전 목적이 침공 보다는 방어에

주목적을 두었음으로 더이상 북진은 하지 못 하였고 3.8선에서 1953.7.27.

휴전협정을 맺게된다.

 

 

 

 

 (피란시절 사람들로 가득찬 국제시장 모습)

 

필로그

 

여기에서 나의 6.25경험담을 줄입니다. 내가 어렸을적에 겪은 일이었지만

민족의 치욕적이고 굴욕을 당한 경험담을 얘기 하는 뜻은 사람은 망각의 동물

이라 지나가고나면 쉽게 잊혀 가겠지만... 

전후세대의 젊은이 들에게 전쟁의 참혹상을 알리고 국가 안보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한반도의 남과 북이 갈라선 이후에도 동해안 공비습격사건, 잠수정 침투사건,

비무장지대 지하땅굴사건, 김신조 청와대 습격사건등 수많은 북한의 도발이

자행 되었고 최근들어 연평도 포격사건과 천안함 피격사건등이 일어 났지만

아직도 많은 종북주의자들이 국회에 진출하기도 하고 야당의 당수가 천안함

침몰에서 폭침으로 바꾸는데 5년여가 걸렸다는 현실을 보며...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당내에서 “안보와 경제는 원래 우리(진보 진영) 의 것”이라고

말한 것이나 “최근 문 대표가 ‘안보와 경제 의제를 (보수 진영에게) 빼앗겨서는 안된다’고 강조

하면서 ‘안보와 경제는 원래 우리의 것’이라고 했다”고 말했다.국회가 마치 코미디언들이 쇼를

하는 곳인지??   앞으로는 이러한 일의 재발을 막고 국민의 각오를 새롭게 더욱 의지를 다지는

의미와 세상의 어느것에 앞서 국가의 안위가 우선되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이글을 썼습니다.

 

   2015. 5. 5.   부 산 에 서    海  園     羅    哲    秀 

부산에서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봉래, 유락, 성지, 양정, 거제, 사하초교4학년겨울 할머니가 돌아 가셨고 

이후 나는 통영으로 옮겨 남의집에 얹혀 살며 진남초교 도남분교, 두룡,충무,용남,진남초교 6학년 1학기를 마치고 2학기때 부산 남항초교로 전학하여 그곳에서 이덕현, 성수남, 황원하, 김병모, 오덕춘을 만났다. 6.25사변으로 부모들이 직업이 없어  자식을 돌볼 여유가 없었던것 같다. 나는대한민국에 부모, 형제, 일가친척이 없는 외톨이다. 어린시절 내가 처했던 경험을 토대로 탈북 청소년기숙형  대안학교를 세우게된 계기가 되었으며  40여명의 불쌍한  애들을 먹이고 재우며 학교가 끝난후 교회에 있는 교실에서 영어, 중국어, 일어를 가르치고 수학,과학, 국어,국사, 음악,무용, 태권도까지 자원봉사 하는 대학생 강사들이 아이들을 가르킨다. 이들이 상급학교를 이수후는 선진 외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계획도 수립되어 있다. 아무것도 가진것 없이 불알두쪽차고 공산지옥을 탈출한 내게는 북한괴뢰정권과 종북주의자가  나의

주적이며 나는 이들을 끝까지 타도 할것이다. 

 

2022.  6.  18.     부산에서  海  園     羅    哲    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