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서명도 받아라” “은행 다시 가라”...복지서류 뺑뺑이, 결국 신청 포기했다
서울 영등포 쪽방촌에 15년째 사는 A(75)씨는 지난해 기초생활수급 제도의 의료 급여 신청을 하려다 도중에 그냥 포기했다. 특별한 소득이 없는데 무릎이 아파 걷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자 병원비 지원을 받고 싶었다. 주민센터에 상담을 받으러 갔더니 ‘부양의무자 금융정보 제공동의서’에 아들 서명을 받아 오라고 했다. 그래서 경기 부천에 가서 아들 서명을 받아왔는데, 이번에는 “딸 서명이 빠졌다”고 했다. 애초에 모든 자녀 서명이 필요하다고 안내하지 않은 것이다. A씨가 인천에 다녀온 뒤 주민센터에 또 갔더니 이번엔 “자녀·손자 이름을 한자로도 적어야 한다”고 A씨를 돌려보냈다고 한다. 한자 병기(倂記)가 서류상 필수 요건이 아닌데도 담당 공무원의 착오로 이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본인 소득을 확인하는 서류를 내려고 은행도 두 번이나 가야 했다. 처음에 통장 사본을 내라고 해서 냈더니, 추가로 1년 치 거래 내역을 더 뽑아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전씨는 “다리가 아파서 원래 잘 걷지 못하는데 서류 준비로 두 달을 뺑뺑 돌기만 했다”면서 “더 고생하기 싫어서 도중에 관뒀다”고 했다.
지난달 생활고에 시달리다 극단 선택을 한 ‘수원 세 모녀’ 사건 이후, 수요자가 신청을 해야 혜택을 받는 ‘복지 신청주의’의 한계에 대한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전문가나 시민단체는 “행정 편의주의적으로 짜인 신청주의 복지 시스템이 시민들을 질리게 해서 중도 포기하는 사람이 많다”고 지적한다. 고령이거나 홀로 살며 생계를 꾸리느라 바쁘고, 장애가 있거나 학력이 평균보다 낮은 경우가 많은 취약 계층에게 ‘먼저 신청하라’고 요구하는 지금의 복지 서비스는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복지 서비스로 꼽히는 기초생활수급 신청을 하는 절차만 봐도 이런 사람들에게 최소 5가지 서류를 내라고 하고, 수시로 추가 서류 제출을 요구하는 등 복지 혜택을 받기 위한 길 곳곳에 높은 벽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본지가 최근 서울 영등포나 용산의 쪽방촌 등에서 만난 10여 명의 취약 계층은 하나같이 “정부 지원을 받고 싶어도 혼자서는 엄두가 안 난다”고 했다. 가장 대표적이면서 기본적인 기초생활수급 신청 단계부터 나가떨어졌다는 사람이 많았다. 기초생활수급 지원은 소득 인정액이 중위소득 30~50% 이하로 최저 생계비에 미치지 못하는 이들에게 생계·의료·주거·교육 등 네 분야로 나눠 급여를 지원하는 제도다. 매년 19만~25만명 정도가 새로 기초생활수급자가 되려고 신청을 한다.
하지만 제출해야 하는 서류만 최소 5가지다. 일반적으로 대상자들은 동 주민센터에 직접 방문해 주민센터 직원과 상담, 준비 서류 목록을 받아 신청을 진행한다. 서류 목록을 받으면 은행(소득 관련 확인 서류 혹은 통장 사본)과 공인중개사 사무소(임대차 계약서), 병원(의사 소견서) 등을 일일이 방문해 서류를 준비해야 한다. 기관 3~4곳 이상을 일일이 방문해야 하는 것이다. 의료 급여를 받는 경우에는 부양의무자 소득까지 따져야 해, 멀리 살거나 호적에는 있지만 연락이 끊긴 자녀를 찾아내야 하는 일도 있다.
심지어 주민센터에서 정확하게 안내하지 않거나 추가 서류를 요구하는 경우도 적잖아 시민들이 수차례 헛걸음을 하기 일쑤다. 예컨대 기초생활수급 신청자 가운데 연령이 18세 이상~64세 이하인 사람은 자활 사업에 참여해야 급여를 받을 수 있는 ‘조건부 수급자’로 분류된다. 일을 할 수 없을 경우, 병원에 가서 건강상 일할 수 없는 상태라는 의사의 소견서를 따로 받아서 내야 한다.
건설현장 일용직으로 근무하다 당뇨 합병증으로 가운데 발가락을 잃어 일을 그만둔 최모(63)씨는 “만 65세 이상이 아니라고, 내가 아프다는 걸 증명하는 추가 서류를 떼오라고 하더라”면서 “발가락이 없는 걸 보고도 서류를 떼 오라는 게 이해되지 않았고 자존심도 상했다”고 말했다.
다른 복지 서비스들도 필요 서류가 복잡하긴 마찬가지다. 만 18세 이상 중증 장애인 중 소득이 일정 기준 이하인 이들에게 지급하는 ‘장애인 연금’ 역시, 소득·재산 신고서, 본인 명의 계좌 통장 사본, 주택 정보 제공 동의서 등 내야 하는 서류가 최소 5가지다. 만 65세 이상 노인의 생활 안정 지원을 위해 지급하는 ‘기초연금’ 역시 사회복지서비스 및 급여 제공 신청서, 소득·재산 신고서, 금융 정보 제공 동의서(본인 및 배우자), 통장 사본 등 4가지 서류를 본인이 직접 모아서 내도록 하고 있다.
제도가 너무 많고 흩어져 있어 자신이 정확하게 어떤 계층으로 분류되고 어떤 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지 헷갈린다는 사람도 태반이다. 실제 보건복지부가 운영하는 복지 포털 ‘복지로’에서 저소득층 대상 복지 서비스를 찾아보니 889건이 나왔다. 장애인 대상 복지 서비스도 781건이었다. ‘저소득층’ ‘생활 지원’이라는 단어로 제도를 찾아봐도 300건이 넘는 제도가 있는 것으로 나왔다. 자기에게 해당하는 서비스를 일일이 찾는 게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에 가까운 셈이다. 부산의 한 기초수급자 지원 단체 대표는 “본인이 차상위 계층인지, 기초생활수급자인지 모르는 수급자도 많다”며 “어르신들이나 이런 걸 처음 해보는 사람들은 혼자서는 도저히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고 했다. 영등포 쪽방촌에 거주하는 이모(49)씨도 “이 동네 사람들이 수급 관련 정보를 얻는 건 대부분 쪽방촌에 있는 무료 병원이나 지인들을 통해서이지 주민센터나 구청이 아니다”라고 했다.
‘의료 수가’ ‘소득 인정액’ 등 일상에서 사용하지 않는 행정 용어 투성이인 복지 서비스가 접근성을 더 떨어뜨린다는 지적도 있다. 일부 공무원의 고압적인 태도 등도 문제다. 영등포에 사는 이모(60)씨는 “올해 초 주민센터에 기초생활수급 신청을 받으러 갔는데 ‘대상자가 되려면 소득이 줄어야 해 아내와 이혼을 해야 한다’고 해 이게 공무원이 할 얘기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정익중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취약 계층 가운데에는 일일이 서류를 발급받아 제출할 의욕 자체가 없는 경우도 많다”며 “복지 사각지대에서 생기는 비극을 막기 위해 정부가 일정 부분 대리를 해주는 등 신청주의의 대대적인 개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승현 기자 mykim010@chosun.com유재인 기자 2015verita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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