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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잘딱깔센’ 쓰고, 구내식당 줄서서 밥 먹는 회장님… “저만 낯선가요?”

레이찰스 2022. 9. 5. 06:20

‘알잘딱깔센’ 쓰고, 구내식당 줄서서 밥 먹는 회장님… “저만 낯선가요?”

 
 

‘근엄’ 손절한 대기업 총수
2030과 소통 나선 이유


‘우리 회장님이 달라졌어요.’

요즘 대기업 총수들, 어딘가 낯설다. 으리으리한 회장 집무실에 앉아 업무 보고를 받거나 홀로 창밖을 바라보며 사업 구상에 빠져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다. 구내식당에서 차례를 기다려 직접 배식을 받고, 아들뻘 되는 20대 사원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셀카를 찍는다. 퇴근 후엔 MZ 세대와 소주잔을 부딪치며 끝장 토론을 펼친다. 수많은 경호원과 임원들에게 둘러싸여 9시 뉴스에서나 볼 수 있었던 기존 창업주들과 비교하면 확연히 달라진 모습. 신비주의에서 탈피해 이른바 ‘인싸(인사이더·주류)’가 되려 고군분투하는 재벌 2·3세에 대한 회사 안팎의 반응은 나쁘지 않다. 소셜미디어(SNS)에서 대기업 회장의 계정을 팔로 하고 그들을 향해 ‘회장님’ 대신 ‘○○형’이라고 부른다. 사생활에 대한 질문도 과감하게 던지며 친근감을 드러낸다. 대기업 오너들은 왜 젊은 층과의 소통에 나선 걸까.

요즘 재벌 총수들은 MZ 세대와 소통하기 위해 SNS에 일상을 공유하고, 틈만 나면 직원과 만나 대화를 나눈다. 왼쪽부터 앱으로 사진 속 자신의 모습을 꾸민 최태원 SK그룹 회장, 직원과 셀카를 찍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지인에게 요리를 해주는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인스타그램·삼성전자·조선일보 DB

손소독제 짜주는 오너

이재용(54) 삼성전자 부회장는 최근 가장 활발한 소통 행보를 보이는 그룹 총수다.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복권된 이후 삼성전자를 비롯한 주요 계열사 현장을 방문하고 있다. 지난달 31일까지 다닌 사업장만 4곳. 평소 차분한 성격의 이 부회장은 전 직원 앞에서 일장 연설을 하는 대신 주로 20~30대 직원들과 소규모 간담회를 가지며 거리를 좁혀가고 있다. 이 부회장은 지난달 26일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을 방문해 직원들에게 직접 손소독제를 짜주면서 “코로나 걸렸던 사람 있느냐” “얼마나 아팠느냐”고 물었다. 제품 관련 보고도 임원이 아닌 MZ세대 직원에게 받았다. 직원들과 나누는 대화도 가벼운 일상 이야기가 많다. 이 부회장은 한 간담회 자리에서 여름휴가 얘기가 나오자 “평생 처음 어머니(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랑 단둘이 5박6일간 휴가를 보냈다. 팔십 다 된 어머니가 아들 걱정에 ‘비타민 많이 먹어라, 맥주 많이 마시지 말라’고 하셨다”고 해 화제가 됐다.

직원들의 반응은 뜨겁다. 이 부회장이 사업장을 찾을 때마다 환호성을 지르고 이 부회장에게 셀카 요청을 한다. 한 직원은 “이 부회장 만나려 휴가까지 미뤘다”고 했다. 한 재계 관계자는 “MZ 세대는 이재용 부회장이 수행원 없이 해외 출장을 가는 소탈한 모습에 매력을 느끼는 동시에 빌 게이츠 등 해외 거물들과의 화려한 인맥을 보며 그를 오너보다는 ‘셀럽(유명인)’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고 했다.

최근 유행처럼 번지는 대기업 오너들의 소통 행보는 정용진(54)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원조 격이다. 경영 전문가들 사이에서 최고의 ‘소통왕’으로 꼽힐 정도로 SNS 활동이 활발하다. 내밀한 일상을 공개하는 인스타그램 팔로어만 77만명. 강혜련 이화여대 교수(경영학)는 “처음엔 ‘지나치게 사람들 관심을 끌려고 한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꾸준한 노력 덕분에 지금은 ‘용진이형’이라 불릴 정도로 팬덤이 생겼다”면서 “기존 재벌 총수들의 권위적 모습에서 벗어나 인간적 면모를 드러내려고 노력한다는 걸 대중도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최태원(62) SK그룹 회장은 최근 들어 SNS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10대들이 즐겨 쓰는 사진 촬영 앱으로 셀카를 찍거나 야식을 먹는 등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을 공개해 인기를 얻고 있다. 참모나 홍보실을 거치지 않고 직접 찍은 사진과 메시지를 올릴 정도로 SNS 활동에 진심이라는 평가. 최 회장은 최근 한 정부 회의에 참석해 주요 관료를 치켜세우며 ‘알잘딱깔센’(’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의 줄인 말)이란 신조어를 사용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정의선(52) 현대차그룹 회장은 일반 사원들과 타운홀미팅을 정기적으로 가지며 소통하고 있다. 지난 6월엔 오은영 정신의학과 박사를 초청해 직원들 고민을 듣는 시간을 마련하기도 했다. 4대 그룹 총수 중 가장 젊은 구광모(44) LG그룹 회장은 평소 “회장이 아닌 대표라고 불러달라”고 하는 등 탈권위 리더십을 보인다.

MZ세대 마음을 사로잡아라

대기업 오너들이 젊은 층과 소통에 적극 나서는 이유는 MZ 세대의 마음을 잡기 위해서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전체 직원 중 절반가량이 MZ 세대이다 보니 이들과 라포(rapport·상호 신뢰 관계)를 형성하는 게 그룹 총수들의 중요한 과제가 됐다”며 “주요 소비층 연령도 낮아지면서 SNS 소통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기업마다 IT 인재 유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자유로운 기업 문화를 강조하기 위한 차원에서 소통을 강화한다는 의견도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기업 총수는 임금이나 처우에 대한 평사원들의 불만을 직접 듣기 어려운데 젊은 직원들과 교류하면서 이런 밑바닥 정서를 자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업 이미지를 쇄신하는 차원에서 소통을 강화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단순히 총수에 대한 기업 내부의 지지를 끌어올리는 것을 넘어 기업에 대한 우호적 여론을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한 대기업 임원은 “오너들이 최순실 사태 등을 겪으며 기업과 경영자의 사회적 영향력을 높이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최태원 회장은 지난해 한 기자 간담회에서 “드라마에 나오는 기업인 모습이 (실제론)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며 “반기업정서를 없애기 위해서라도 기업과 기업인들의 적극적인 소통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미지 메이킹보다 중요한 것

다만 오너들의 소통 행보에도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SNS에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거나 민감한 사안을 거론할 경우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것. 강혜련 교수는 “대기업 오너는 사회적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100번 소통을 잘해도 1번 실수하면 미치는 파장이 크다”며 “어설프게 다른 오너의 방식을 따라 하기보다 오너 개인 성향과 기업 이미지에 맞는 소통 전략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한 재계 관계자는 “일부 오너는 아직 뚜렷한 사업 성과가 없이 이미지 메이킹에만 치중하는 경우가 있다”며 “단순히 좋은 이미지만으로 기업을 이끄는 데에는 한계가 있고 메시지의 힘도 떨어지기 때문에 선한 모습을 보이는 것 못지않게 강력한 리더십으로 기업이 먹고살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했다.

최인준 기자 pe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