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통령을 달려오게 만든 대한민국 전자공업을 일으킨 3희(熙)- 박정희, 김완희, 이건희>
5월 20일 방한(訪韓)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과 함께 제일 처음 찾은 곳은
경기도 평택에 있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이었다. 한미 양국 대통령과 나란히 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석유를 비롯해 이렇다 할 전략자원이 없는 나라에 반도체가 있어서 미국 대통령도 대한민국을
붙잡으려고 몸이 달아 있구나!”
“그런 소중한 회사를 이끄는 CEO를 지난 5년 간 이 나라는 어떻게 대접했나? 못 잡아 먹어서
걸핏하면 감옥에 보내고, 삥 뜯어낼 호구로만 생각하고....”
그러면서 또 생각나는 두 사람이 있었다. 박정희(朴正熙‧1917~1979) 대통령과 김완희(金玩熙‧1926~2011)박사였다.1926~2011)박사였다.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김완희 박사는 1953~1955년 미국 유타대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았다. 이때 그는 ‘전자공학계의 피타고라스 정리’라고 불리는 ‘브루니 정리’의 예외를 발견해
발표했다. 김 박사가 발견한 이론은 전자회로 설계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것으로, 이 발견으로
김 박사는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게 됐다.
김완희 박사가 박정희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61년 11월 박 대통령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을 때였다. 한국전 참전 미군 장성들이 마련한 자리에 초대받아
갔던 김 박사 눈에 비친 박정희 장군과 그 일행은 ‘시골티가 줄줄 흐르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1965년 5월 박 대통령이 두 번째로 방미(訪美)했을 때, 김 박사는뉴욕시장이 베푼 만찬에 참석
해서 박 대통령을 지켜보았다.
김완희 박사가 박정희 대통령과 본격적으로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1967년 9월 박정희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을 찾으면서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전기기계공업’ 육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
했다. 당시에는 아직 ‘전자공업’이라는 말이 생기기 전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는
‘전자공업(electronics industry)’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사람이 바로 김완희 박사였다. 이 무렵부터
김완희 박사는 ‘전자공업’ ‘전자산업’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 말은 곧 일본이 만들어낸
‘전기기계공업’이라는 용어를 대체해 버렸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
공학 관련 용어들이 대부분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용어임을 생각하면, 매우 희귀한 사례인 셈이다.
1967년 9월 김완희 박사가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한국의 전자공업은 라디오나 TV를 조립생산
하는 수준이었다. 이 분야의 선두주자였던 금성사조차도 홍콩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리버스
엔지니어링’으로 흉내 내서 국산 라디오를 만들려고 몸부림치던 상황이었다. 김완희 박사는
후일 이렇게 회고했다.
“상공부 이철승 차관과 함께 한국전력, 대한전선, 전파연구소, 중앙공업연구소, 부산 동래에 있던
금성사 등을 돌아보았죠. 당시로서는 그게 전부였어요. 다 보고 나니 짐작이 가더군요. 한 마디로
서구와 비교하면 원시적인 수준이었습니다. 그나마 생산되는 전자제품은 지독하게 조잡했어요.”
이렇게 한국 전자업계 현황을 돌아본 김완희 박사는 상공부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브리핑 자료를
만들었다. 9월 13일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상공부 장관, 청와대 비서관 몇 명이 참석한
가운데 브리핑이 시작됐다. 브리핑은 2시간 반동안 진행됐다. 김 박사의 회고다
“박 대통령은 정말 꼼짝도 하지 않았어요. 차트에서 눈을 뗀 적도 없었습니다. 교단에서 많은 학생
들을 가르쳐 왔지만 박 대통령만큼 집중해서 듣는 학생을 본 적이 없었더든요. 보고를 하면서
보니 다소 전문적인 내용까지도 박 대통령은 이해하는 듯 했어요.”
브리핑이 끝난 후, 김완희 박사는 박 대통령과 점심 식사를 같이 했다. 박 대통령은 김완희 박사의
숟가락 위로 깻잎을 얹어 주었다.
식사가 끝난 후 박정희 대통령은 김완희 박사를 데리고 서재로 갔다. 잠시 후 박 대통령은 서랍
에서 뭔가를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김 박사, 미국 모토롤라사가 한국에서 이걸 만들겠다고 하면서 공장 부지 매입을 허가해 달라고
합니다.”
김 박사가 보니 탁자 위에 올려진 것은 작은 트랜지스터였다. 박 대통령이 말을 이었다.
“요 쪼매난 것이 한 개 20~30달러나 하고, 손가방 하나면 몇 만 달러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도 면직물밖에 수출하지 못하니…. 차로 한 곳간을 채워도 손가방 하나만도 못하니….
내 이래서 김 박사를 보자고 한 겁니다. 김 박사, 우리나라도 전자공업을 육성하고 싶은데 도와
주시오.” 김완희 박사는 잠시 생각해 본 후 “저 혼자 힘으로는 벅차고 미국에 돌아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답했다. 박 대통령은 비용이 얼마나 드느냐고 물었다. 김 박사는
“어림잡아 20만 달러 정도는 있어야 합니다. 일을 시작하려면 우선 10만 달러가 필요합니다”
라고 답했다.
그해 9월말 김완희 박사가 뉴욕으로 돌아갔을 때 상공부에서 보낸 10만 달러가 이미 입금되어
있었다. “가난한 한국 정부가 거액의 돈을 부친 것을 보니 그만큼 박 대통령이 전자공업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재촉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동안 밀린 업무를 처리한 뒤 본격적으로
보고서 구상을 하기 시작했지요.”
김완희 박사는 ‘한국형 전자공업’ 육성을 위해 미국 내 전문가들에게 각국의 전자공업 육성 사례
조사 용역을, 한국의 KIST에게는 한국의 실상에 대한 조사 용역을 맡겼다. 이를 바탕으로 김완희
박사는 1968년 1월 ‘전자공업센터 설립 계획안 – 국가의 기초산업과 수출산업으로서의 전자공업
중점 육성책의 근거’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1968년 3월 7일 김완희 박사는 전자공업 관련 미국
학자들과 기업인들과 함께 다시 한국을 찾았다. 그해 7월 김완희 박사가 다시 귀국했다. 7월 15일
박 대통령은 김 박사를 청와대로 불러 저녁 식사를 같이했다. 식사를 마친 후 박 대통령은 현관까지
나와 김 박사를 배웅했다.
“우리들이 차에 탈 동안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심호흡을 하시더군요. 그리고 차가 떠날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계셨습니다. 어둠 속에 홀로 서 있는 박 대통령이 너무나 외로워 보였습니다.
말끝마다 ‘가난한 한국을 부강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박정희 대통령을 도와 드려야겠다고
그때 차 중에서 결심했던 것입니다.”
1968년 8월 1일 김완희 박사는 청와대 집무실에서 전자공업 육성 방안에 대한 공식 보고를 했다.
김정렴 상공부 장관, 신범식 대변인, 신동식 경제제2수석(과학기술담당)비서관 등이 배석했다.
김완희 박사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 이처럼 전자공업은 제품 사이클이 매우 짧아서 국내에서 진득하게 독자 기술을 개발해서는
이미 늦어버립니다. 어떻게 하든 선진 기술을 도입해 수출 제품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한국의 전자공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김완희 박사를 ‘우리 김 박사’라면서
예우했고, 두 사람은 박 대통령이 돌아가실 때까지 130여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전자공업
육성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진학한 것도 전자공업
육성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열망이 투영된 결과다. 김완희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1960년대말, 세계의 전자공업은 막 출발하려던 기차와 같았어요. 우리는 그 막차 맨 끝을 타려고
했던 겁니다. 1970년대를 지나면서 그 기차의 속도는 빨라졌고 지금은 제품이 시장에 나오면
3개월 뒤엔 다른 제품이 그 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변화의 속도가 빨라졌어요. 이런 판에 후진국들이
제 아무리 흉내 내며 따라오려 해도 불가능하게 되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우린 그때 참 운이 좋았던
거죠. 그런 면에서 박정희란 분을 대통령으로 만난 것은 한국민에게 행운이었다고 봐요.”
이후 대한민국은 전자공업 육성을 향해 조금씩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4년 12월,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의 차남 이건희(李健熙‧1942~2020) 당시 동양방송 이사는 사재(私財)를 털어 한국
반도체 지분 50%를 획득했다. 한국반도체는 그해 1월 강기동 박사에 의해 설립된 작은 반도체
회사였다. 오늘날 세계를 흔드는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건희 회장은 3년 뒤인 1977년 12월 한국반도체의 나머지 지분 50%를 인수한 후, 이듬해 3월 삼성반도체로 상호를
바꾸었다. 1980년 1월 삼성반도체는 삼성전자에 흡수 합병됐다.
흥미로운 점은 김완희 박사가 1968년 8월 1일 전자공업 육성방안에 대해 청와대에서 브리핑을
하기 10여일 전인 7월 20일 《중앙일보》에 김완희 박사 인터뷰 기사가 크게 실렸다는 점이다.
이 인터뷰에서 김 박사는 대기업이 전자공업 분야에 진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당시 삼성 주력
기업이 아닌 중앙일보-동양방송을 맡고 있던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은 분명 이 기사를 보았을
것이다.
박정희, 김완희, 이건희 - ‘3희(熙)’가 대한민국 전자공업을 만들어냈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전자공학 분야의 석학 김완희 박사를 불러들여 모터롤라의 트랜지스터를 앞에 놓고
“요 쪼매 난 것이 한 개 20~30달러나 하고, 손가방 하나면 몇 만 달러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도 면직물밖에 수출하지 못하니…. 차로 한 곳간을 채워도 손가방 하나만도 못하니….
내 이래서 김 박사를 보자고 한 겁니다. 김 박사, 우리나라도 전자공업을 육성하고 싶은데 도와
주시오.”라고 애타게 호소했다. 사실 그때 한국은 가난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할 때였다. 경공업
제품 수출은 잘 되고 있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거기에 자족하지 않고 그 이후의 먹거리를 찾아
나섰던 것이다.
김완희 박사는 그 호소에 마음이 움직여 박 대통령을 열심히 도와 한국 전자공업의 초석을 놓았다.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은 반도체의 무궁한 가능성을 내다보고 사재를 털어 반도체 회사를 사들였다. 그리고 오늘날 삼성전자는 세계 탑클래스의 전자회사를 넘어서 한미동맹의 핵심적인 연결고리가
되었다.
‘가난한 한국을 부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던 박정희 대통령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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